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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0. 2024

1일차. 체크인하기 - (6)

휴대폰 화면을 본다고 이 여자의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내 얼굴에서 휴대폰을 떼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이 켜졌다. '이쁜 딸'. 이쁘긴 개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숨을 골라본다. 하지만 그에 비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사장님은, 아닌가. 사장의 아버님? 뭐 어쨌든 이쪽은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담배만 태우고 계신다.


한숨을 쉰다.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이 한숨도 겨우 쉬었다. 대체 뭔 소리를 하냐며 잡아떼야지. 숨을 흡- 들이켜고 다시 휴대폰을 귀에 댔다. 하지만 여자는 내가 다시 휴대폰을 들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름 박희례. 나이 29세. 아직도 부모님 집에서 사는 세대원이고, 현재 직장 없음.]

"저기요."

[지방국립대학교 인문대 출신. 졸업 후엔 전공 살려서 취업해 봤는데 수습 기간도 못 버티고 자진 아웃. 퇴사 후 직업학원 다니면서 자잘하게 자격증 몇 개 땄고, 이후에 또 취업했지만 이번엔 1년을 못 넘기고 또 아웃. 그리고 지금 백수 유지. 일용직으로 최소한의 소득만 벌면서 살고 있고.]

"뭐 하는 거야."

[당신 말처럼 깊숙한 산중에 있는 펜션이잖아. 그것도 집주인집이 바로 옆에 있는. 손님만큼이나 집주인의 리스크도 커. 별 미친놈이 다 오니까. 일종의 보험이라고 해두지.]

"손님 뒷조사가 보험이라고?"

[틀린 말은 없나 보네?]


틀린 말은 없다. 다 맞는 말이다. 이상하게 심장이 차분히 뛴다. 너무 차분히 뛰어서 이대로 멈출 것처럼 박동이 느려졌다.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아는 당신도 내가 죽는 게 당연해 보이나 봐?"


나와 만난 적도 없는 당신조차도 이런 내가, 이런 삶을 사는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건 당연해 보이나 봐?


[아니.]


헛웃음이 났다. 죽음을 염두에 두었다 말하는 사람에게 해주는 말이야 뻔하다. 보나 마나 '아니, 죽으려고 하지 마. 생명은 소중한 거야' 아니면 '그딴 걸로 죽겠다니 나약하네'겠지.


[박희례 씨, 당신 펜션 가기 전에 휴대폰 해지했던데? 가지고 있는 전 재산 5백만 원을 전부 현금화해서 그중 450만 원을 펜션 숙박료로 지불했고. 아마 나머지 50만 원은 펜션에 있으면서 다 쓸 요량으로 가지고 있겠지. 거기까지 가는 버스비 모두 현금으로 냈을 거고.]

"......"

[내가 당신 의도를 알게 된 근거, 이거면 될까? 한 달 숙박은 좀 의외지만.]


입술에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그러니까 피차 '비밀 유지' 부분에서는 같은 목적이 있는 것 같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각서에 시원하게 사인하고 객실 들어가서 편히 쉬시죠. 내가 잠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꽤 비싼 침대를 썼거든. 편할 거야.]

"그쪽은 아무 상관없어요?"

[뭐가?]

"당신 펜션에 죽으려고 온 손님이 있다는 거. 상관없냐고."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깊게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내심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하다.


[당신은 어때?]

"......"

[내가 상관있었으면 좋겠어, 상관없었으면 좋겠어?]

"......"

[한 달 동안 묵으면서 잘 생각해 봐.]


이번에 말을 못 한 건 어이가 없어서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당신이 뭔데. 아닌가? 애초에 내가 상관없냐고 물어본 것부터 잘못된 건가.


아니다. 왜 이딴 펜션에 재수 없게 걸려가지고. 아이고, 골이 아프다.


[아무튼 숙박료는 환불 못해주니까 빈 손으로 돌아가. 아빠가 터미널까지는 태워주실 거야. 근데 그건 너무 아깝잖아? 그러니까 그냥 잘 지내다 가. 각서에 사인은 꼭 하고. 별 거 아니잖아?]

"아니, 사장님."

[안 프로.]

"뭐?"

[사장님은 우리 아빠고, 나는 안 프로라고.]


허, 뭔. 본업은 대단한 사람인가 보지? 자의식 과잉이다. 재수 없는 여자. 왜 이렇게 재수 없지?


"저기요, 안 프로님. 물어봅시다."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보자. 박희례.]


멋대로 전화가 뚝- 끊겼다. 침이 흘러서 황급히 주워 닦다 보니 입이 벌어져 있는 걸 그제야 알았다. 완전히 이 여자, 안 프로의 페이스에 놀아났다.


담배 냄새가 화악 다가왔다. 사장님이 맞은편에 도로 앉으셨다. 싱긋 웃으신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머리 희끗하신 사장님도 꼬박꼬박 나한테 존대하시는데, 안 프로는 뭐야? 냉큼 반말부터 찍찍. 나는 안 프로가 먼저 반말을 하길래 받아쳤을 뿐이다. 흥.


그러니 지금 내가 각서에 사인하는 것은 절대 안 프로의 페이스에 말려서가 아니라 완전 자의로 결정한 것이다.


안 프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난 여기 죽으러 왔다. 죽기 전에 한 달만 더 살아보려고, 그 한 달을 알차게 쓰고 후회 없이 죽겠노라 다짐하고 온 거다. 그러니까 이 사인은 온전히 날 위해서 하는 거야.


사인한 각서를 소중히 손에 쥔 사장님이 벌떡 일어나셨다.


"객실 소개해드리죠."


사장님의 미소가 달리 보인다. 아까까지만 해도 인자하고, 푸근하고, 좋은 말은 뭐든 갖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좋기만 한 인상이었는데. 지금 내 눈엔 수상할 정도로 손님의 신상을 자세히 알고 있는 펜션 사장의 아빠로만 보인다. 딸이 어떤 이상한 일을 해도 아빠잖아. 그것이 불법적인 일이든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든 다 이해해주고 덮어주려 할 것이다.


아니. 맞네. 모든 정황이 다 맞아떨어진다.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펜션에서 손님에게 비밀유지각서를 쓰도록 강요하는 이유로는 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말마따나 무언가에 씐 듯 각서에 사인해버린 이상 이제 객실에 들어가는 순간 내게 어떤 이상한 일이 생겨도, 갑자기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죽어버린 내 몸을 가지고 무슨 해괴망측한 일을 한다 해도 아무도 알 수 없겠지?


사장님이 펜션으로 들어가는 울타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장기 밀매, 아니면 살인 공장? 분명 둘 중 하나가 확실했다. 이미 머리로는 발을 딛는 이 흙 속에 수많은 손님들의 시체가 엉망으로 묻혀있는 그림을 상상하느라 바빴다.


사장님이 날 향해 돌아선다. 그 몸짓이 슬로우 모션이 걸린 것처럼 아주 느리게 보였고, 나를 둘러싼 공기가 아주 무겁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뭐든 잘못했다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기 일보직전이었다.


"우리 딸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께선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시더니 카드 두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이런 시골에서 뭔지도 모르는 각서에 사인하라는데 선뜻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지금 손님 기분이 나쁜 거, 얼마든지 이해해."


두 장 모두 평범하게 생긴 사각형 카드였지만 막상 받아보니 온통 하얗게만 칠해져서는 어떤 것도 쓰여있지도, 그려져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우리 펜션, 좋은 곳이에요. 우리 딸이 정말 잘 지으려고 노력했고. 그만큼 펜션을 많이 아끼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러니까 우리 딸도, 이 펜션도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않길 바라요."


여기까지 듣고 나니 이걸 안 여쭤볼 수가 없었다.


"여기 귀신 들린 펜션이라고."

"......"

"사람도 여럿 죽어나갔다고, 여기 오는 버스에서 어떤 할머니가 그러시던데. 사실인가요?"


내 질문에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너무 활짝 웃으신다. 나름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질문을 들으시면 정색을 한다거나 아무 말이나 얼버무리거나 하실 줄 알았다. 내심 당황해하시는 모습에 음침한 시골 구석에서 몰래 살인 공장을 운영한다는 내 상상에 근거가 되어주실 걸 기대했다.


"정말 사실이에요?"


웃기만 한 채 아무 말은 안 하고 이번엔 본인의 가슴 주머니에서도 카드 한 장을 꺼내기만 하는 사장님이 답답해 대답을 보챘다. 사장님의 카드 색은 파란색이었다. 역시나 아무런 글씨도, 그림도 없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각서에 사인을 했네요?"


사장님의 반문에 할 말을 잃었다. 내 정곡이 찔렸다. 아팠다.


"말이란 건 낙인 같은 거라.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손님은 믿지 않을 수 있지. 그러니 본인이 직접 확인해봐야 되지 않겠어요?"

"......"

"한 달 동안 심심하진 않겠어요? 허허."


사장님이 웃는 모습에 어색하게 따라 웃게 되더라. 정확한 대답도 듣지 못했는데 또 이 가벼운 귀가 팔랑거려서 홀랑 납득이 갔다. 사실 사장님이 어떤 대답을 하셨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사장님은 아주 여유롭게 평범한 남자 가슴까지는 높이 솟은 울타리 문에 갖다 대었다. 삑- 소리가 난다. 자세히 보니 잠금장치가 터치식이다. 키오스크에 이어 신축 아파트에서나 볼 법한 그 터치식 도어락이 버스도 하루에 다섯 대밖에 안 다니는 이런 시골에 있다.


"아무렴 부지런히 따라와요. 그 카드가 객실 출입 카드고, 그거 없으면 펜션은 고사하고, 이 울타리도 못 여니까 절대 잃어버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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