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내 INAE Oct 07. 2024

1일차. 체크인하기 - (5)

테이블 위에 두 장의 종이가 올려졌다. 사장님의 손가락을 따라 왼쪽 종이의 제목을 읽었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숙박 시 주의사항...?"

"우리 펜션에 머무는 동안은 꼭 지켜주셔야 하는 것들이에요."

"일곱 가지나 되는데요?"


조금 놀란 내가 묻자 사장님이 싱긋 웃으시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또 몇 장 꺼내셨다. 눈을 찌푸리면서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씀하시는 걸 보니 나름의 대본인가 보다.


1. 무조건 실내 금연


"어디서 담배를 태우건 본인 자유지만 절대 펜션 내부에서는 흡연하시면 안 됩니다. 흡연 즉시 스프링클러가 작동될 거고, 그로 인해 손해가 발생하면- 배상을 청구할 것입니다."

"그럼 펜션 내부에서 음식을 못하겠네요?"

"스프링클러가 담배연기만 인식해서 작동된대요."


담배연기만 인식하는 스프링클러가 있나? 애초에 스프링클러가 연기를 인식하기도 해?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기술이 발전됐나 보다. 조금 씁쓸하구먼. 그나저나 흡연자가 아니라 이건 나한테 쉽다. 다음.


2. 개울가에서 취사 및 취식 금지


"물론 개울에서 물놀이하면서 먹는 음식이 맛있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주민 생태계와 환경 보호 차원에서 개울가에서의 취식 행위는 금지입니다. 구청에서 불시검문 나와 적발되면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간단한 과자나 음료수도 안 되나요?"

"불을 사용해서 요리해 먹는 게 아니면 무조건 안 되지는 않는데, 그럴 경우 반드시 쓰레기는 모두 수거해 오세요. 음식물쓰레기도 강에다 버리지 마시고."


3. 펜션 관리실(컨테이너) 출입 금지


"어차피 열쇠가 없으면 못 들어가는 거야 당연한데, 종종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거듭 말하지만 컨테이너가 무인으로 운영돼서 꼭 필요한 보안 조치니까 유념하시고."


4. 창문 및 출입문 개방 금지. 개방 시 반드시 방충망 닫을 것
5. 벌레 등 모든 동물 살생 금지. 발견 즉시 관리자 호출하여 처리


"여기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벌레가 많아요. 이따가 펜션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1층에 창문이 없어요. 바깥 상황 확인하라고 출입문에 조그맣게 낸 창문이 다야. 밤에 불을 켜면 날벌레들이 죄다 몰려와서 일부러 그렇게 지었대요."

"그럼 창문이 아예 없어요?"

"2층에 있지. 근데 그 창문도 벽이 아니라 천장에 있어서 개폐할 수 있는 창문은 아니에요. 그럼 걱정할 게 없느냐? 그래도 벌레가 어느 구멍으로든 들어오긴 하잖아요. 오갈 때 방충망만 잘 닫아주면 괜찮을 텐데 주먹만 한 나방이나 말벌 같은 게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럼 절대 죽이지 말고 관리자를 부르란 얘기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사장님이 웃는다. 익숙한 듯 체념한 듯한 미소였다.


"우리 딸애가 뭐든 죽이는 걸 싫어해서요."


6. 자기 소유 외 모든 동물에 먹이 급여 금지. 특히 길고양이!


"이 근방에 유기동물이 많은가요?"

"원래 이런 시골에 동물이 많지. 일부러 찾아와서 동물을 버리고 가는 사람도 꽤 있고."

"그럼 먹을 거 조금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사장님이 이번엔 한숨을 푹- 쉬신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은밀히 속삭이셨다.


"우리 딸애가 그런 거 엄청 싫어해요."

"벌레는 못 죽이게 하면서 불쌍한 동물은 굶어 죽게 놔두라는 거예요?"

"아휴, 몰라. 나도 딸애 몰래 애들 보이면 간식 주긴 해요. 아무튼 우리 딸한테만 안 보이게 해 줘요."

"아, 네, 뭐..."

"그럼 이제 마지막인데... 이게 제일 중요해요."


7. 펜션 관련 정보 유출 전면 금지


"유출이라면 리뷰 남기는 거 말씀이세요?"

"친구한테 전화해서 어디에 이런 펜션 있다더라 하는 얘기도 다 포함."

"보통은 좋게 리뷰해달라거나 지인들한테 많이 소문내달라고 하지 않나요?"


애초에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막상 아예 언급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쓰여있으니 무슨 청개구리 심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제야 나란히 놓인 오른쪽 종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유지각서>

'000(이하 을)은(는) 요정펜션(이하 갑)에 관한 위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주변 정보, 요금, 예약 방법, 제공받은 서비스 등 어떠한 관련 정보도 외부에 유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때 외부에 정보를 유출하는 행위에는 숙박 정보를 사진으로 캡처하는 행위, SNS 등 온라인상에 숙박업소 이용 후기 또는 갑을 이용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모든 종류의 게시글을 업로드하는 행위, 지인에게 대화나 통화 등의 소통으로 갑에 대한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행위, 개인적 소유 목적으로라도 사진 및 동영상을 촬영하는 행위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을은 갑의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각서 내용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즉시 퇴거 요청을 받을 수 있고, 이에 반드시 따라야 하며, 경우에 따라 을의 유책으로 발생했다고 판단하는 모든 손해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할 것을 약속한다.'


"이게 무슨...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각서에 사인하라고요?"

"그렇지."

"사인 안 하면 체크인도 못해요?"

"안타깝지만, 그렇죠."

"아니, 무슨 놈의 펜션에서 이런 각서를 받느냐고요!"


무례한 말이다. 안다. 그렇지만 불쾌한 걸 어쩌냐. 나만 그런가?


이 각서는 협박이다. 적어도 나한텐 그렇게 보인다. 함부로 와선 안 될 곳에 온 건 나의 자유니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입 다물고 있으라는 협박.


'거기 귀신 들렸어.' 아니다. 이것보다도 '거기서 사람이 몇 명이 죽어나갔는지 몰라.'라던 할머니의 경고.


'풉-' 무인으로 운영한다던 컨테이너 안에서 들었던 분명한 누군가의 나를 향한 비웃음.


그리고 여기. 경찰이나 구급차를 부르면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은 깊은 산중마을에서 손님들에게 각서까지 강제로 쓰게 하면서 비밀리에 운영되는 펜션.


"사인 못해요."


뭔진 몰라도 무슨 불결한 꿍꿍이가 있는 펜션임엔 틀림없다는 생각에 완강한 태도를 갖추기로 마음먹었다. 마음 같아서는 각서를 냅다 들고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쇼맨십이니까 참았고. 일단 여유 넘치는 포즈로 각서를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냈다.


아마 사장님은 한 달 숙박료를 일시에 선불로 낸 나 같은 대박 손님을 놓치기 싫어서라도 매달릴 것이다. 그럼 나는 "됐고, 환불해 주세요"라는 태도만 일관해야지. 그럼 사장님은 당일 취소는 환불해 줄 수 없다고 할 것이고, 그럼 나는 백 번 양보해서 하루치 숙박료 빼고 나머지 몽땅 달라고 해야지. 받아들일만한 요구지만 이런 산중에 있는 펜션에 한 달 빼곡히 매출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 싫으시겠지? 그러니 사장님은 내게 일부 할인 또는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겠다고 협상을 하시겠지? 그럼 못 이기는 척 한 번 들어나 볼...


"어, 안 프로! 나야."


이 상황을 완벽히 내 손에 넣었다고 단꿈을 꾸고 있을 때, 사장님은 언제 전화를 걸었는지 귀에 댄 휴대폰에 목소리를 높였다. 안 프로?


"손님이 왔는데, 응, 한 달 손님. 응."

"......"

"코드 제로야."


심장이 조여왔다. 무언가 잘못 됐다. '코드 제로'? '안 프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귀신 들린 펜션 사장님이 할 만한 말이라면 뭐지?


젠장. 사람 잘못 건드렸나? 나 이대로 죽는 건가? 이럴 줄 알았어. 이 빌어먹을 깊은 산중의 펜션이 사실은 장기 밀매의 본고장인 거야.


"손님?"

"네?!"


내 앞쪽 테이블을 툭툭 치는 사장님의 두꺼운 손가락이 어마어마한 몽둥이로 보이는 터,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절대 더워서가 아니다. 오만가지 생각에 과하게 놀란 내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사장님이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통화해 보셔."

"네? 누구랑요? 왜요?"

"우리 펜션 사장님."

"사장님이라뇨... 사장님 아니셨어요?"

"난 바지사장이지. 진짜 사장은 우리 딸. 그러니까 통화해 봐요."


그리곤 내가 휴대폰을 건네받기도 전에 내 앞에 놓으시더니 벌떡 일어나셨다. 성큼성큼 걸어가 밭 쪽으로 가시곤 덤덤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금연이라고 하지 않았... 아, 실내에서만 금연이랬지.


이걸 받아야 돼, 말아야 돼, 고민하면서도 손은 저절로 사장님의 휴대폰을 집고 있었다. 수전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손이 떨리는 걸 보니 나 진짜 무서운가 보다. 진짜 죽을까 봐 그래? 정신 차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아직?


"여보세요...?"

[왜요?]


인사도 없이 불쑥 본인의 용건부터 내뱉는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내 또래일려나. 조금 심장이 진정됐다. 영화 속에서 봤던 무시무시하게 생긴, 덩치도 크고 문신으로 범벅인 남자일까 봐 지레 겁먹었다.


"네?"

[각서에 왜 사인하기 싫으냐고요.]


그래서일까. 주눅 들었던 마음이 용기를 얻어서 내 또래라고 생각되는 이 젊은 여자, 사장님의 딸이라는 이 사람에게 목소리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이런 펜션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 줄 알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래요? 그쪽이야말로 말해봐요. 내가 왜 이 각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무슨 상관이에요?]

"참나. 이유를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사인하지 않으면 체크인도 못하게 하면 안 되죠. 엄연히 사용료 다 지불한 고객의 권리인데."

[그러니까. 무슨 상관이냐고요.]

"뭐라고요? 이 여자가 진짜..."

[어차피 죽을 거면서 각서에 사인하는 게 뭔 대수냐고.]


누군가 목울대를 툭 쳐버린 듯이 말문이 막혔다.


"지금 뭐라고..."

[당신 거기 죽으러 갔잖아. 어차피 어디에도 말 안 할 작정 아니었어?]

이전 04화 1일차. 체크인하기 -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