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문이 무겁고 크고 단호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펜션까지 이어진 길에는 야자수매트가 깔려있다. 울퉁불퉁하고 얼룩덜룩한 걸음이 내딛을 때마다 느껴진다. 두 개의 펜션은 거의 똑같이 생겼는데, 현관문 색이 달랐다. 하나는 하얀색, 하나는 검은색. 눈치껏 사장님이 내게 주신 카드색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역시나 사장님은 나를 하얀색 문이 달린 펜션으로 안내했다.
사장님이 손을 내밀어 하얀색 문에 달린 터치식 도어락을 가리켰다. 들고 있던 카드를 갖다대니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드디어. 감격스러웠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잠깐만."
당장에 펜션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사장님이 내 앞을 가로막으셨다. 씰룩대던 엉덩이가 안달을 낸다. 또 뭐냐며 짜증을 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개털 알레르기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왜 그러세요?"
"이 펜션이 사실은 손님 없을 땐 우리 딸이 지내는 집이에요. 그래서 곰탱이도 딸이 있으면 이 집에 자주 들어가고 그러거든. 우리집 강아지. 당연히 손님맞이할 땐 깨끗하게 청소도 하고, 침구도 새로 깔고 하는데 개털이라는 게 그래요. 아무리 치워도 한 올씩 튀어나올 때가 있다고."
갑자기 펜션이 달리 보였다. 그저 그런 숙박업소에서 누군가가 사는 집으로. 남의 집. 강아지 귀엽겠다. 궁금하다.
"그럼 따님이 여기 오면, 제가 혹시 집을 내어주거나 해야 되나요?"
"절대 아니지. 그랬으면 객실로 내어주지도 않아. 게다가 떡하니 저 앞에 우리집이 있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펜션이야 원래 남의 집을 잠시 빌리는 것이겠지만, 이상하게 이 펜션은, 이 집은 느낌이 남다르다. 안 프로...라고 말해도 되나. 안 프로의 집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 여자가 정말 잘 지으려고 노력했고, 그만큼 아낀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안 프로의 집이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미묘한 복수심이었을까? 아까의 통화에서 내내 그 여자의 말에 제대로 대응을 못한 답답함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그래서 그 여자의 집이라도 뺏어야겠다 싶었다. 그래, 그래서다. 그렇게 아끼는 집을 한 달 사는 손님에게 뺏겨 마음대로 들어오지도 못해 아쉽고 안달 난 모습이 보고 싶다.
"그래도 개랑 같이 사는 집이라서 찝찝하다거나 방이 마음에 안 들면 말해도 돼요. 검은 문 객실이 지금은 비어서 바꿔줄 수 있으니까."
"아니요, 아니요. 진짜 괜찮아요. 애초에 애견 동반 가능 펜션인 거 알고 왔는데요."
못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아직도 분해. 나에 대해 다 아는 척. 근데 그게 다 맞아서 더 분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 속마음은 아무것도 모를 거면서 너무 가볍게만, 뻔히 보이는 듯 쉽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분하다. 잠깐 집에서 뭐 두고 왔다고,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해도 절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와 안 프로의 집, 아니지, 나와 내 펜션 사이를 막고 있던 사장님이 드디어 몸을 비켜주셨다.
"그래요. 아까 사인했던 주의사항이랑 비밀유지, 그런 것들 꼭 각별히 지켜주시고. 뭐... 나머지는 차차 알아가 봅시다. 좋은 시간 보내요. 아, 젊은 사람이니까 이건 알지? 여기에 카드키 꽂아야지 전기 들어오는 거."
어쩐지 카드를 두 장 주시더라니. 시골 펜션의 최첨단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감탄하며 사장님의 손가락을 따라 현관문을 들어가 몸을 꺾어 문 옆 키홀더를 찾았다.
그보다 먼저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게 뭐예요?"
키홀더 옆에 나란히 매달린 검은색 전자 메모보드. 서점에서 파는 것을 많이 봐서 안다.
궁금했던 건, 메모보드에 적힌 형광색 글씨.
< □ 체크인하기 >
내 물음에 사장님은 어깨를 으쓱하셨다.
"이건 나도 모르겠네. 나중에 우리 딸 오면 한 번 물어봐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신 사장님은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새라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지셨다.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긴 했지만 울타리 너머 본인의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좀 멍하니 멈춰있었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혼자가 됐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도 펜션 안은 꽤나 많이 어두웠다. 1층에 창문이 없다고 했었지. 정말로 현관문 위쪽에 주먹만 하게 낸 창문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불투명한 유리를 써서 빛이 걸러져 들어왔다. 아참. 벌레 들어오니까 문 열고 있지 말라고 했지. 주의사항이 떠올라 냉큼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이제 이 객실에 빛은 불투명한 현관문 창문에서 걸러져 들어오는 빛과 메모보드 속 형광색 글씨가 전부였다.
다시 메모보드를 보니 '체크인하기'라고 쓰인 옆에 안이 빈 네모 표시가 마음에 걸렸다. 잘 쓰인 글씨에 비어있는 네모. 문득 이 네모를 채워주고 싶었다. 내가 쓴 글은 절대 아니지만 날 위해 쓰인 글 같았다.
마치 날 환영하는 것 같았다.
홀린 듯이 메모보드에 끼워진 전용 펜을 빼내 네모 위에 체크 선을 그었다.
< ☑ 체크인하기 >
별 것도 아닌데 괜히 무언가 해낸 것 같고 그렇다. 오늘 할 일 다 했다.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다. 좋아도 되나?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걸로 기분이 좋아도 되나. 내가 쓴 게 아닌 누군가의 계획을 뺏어 체크했으면서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게 말이 되나. 안 되지.
안 될 게 있나? 주인 없는 집을 손님 쓰라고 내어줬으면서 설마 주인 본인이 체크하려고 쓴 글이겠어? 애초에 집주인이 '체크인하기'를 오늘 할 일로 손수 썼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손님을 환영한다는 문구로 이게 적절하나?
아니다. 안 프로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여자니까.
아, 몰라. 별 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자기가 쓴 글에 내가 체크한 게 억울하면 직접 와서 말하라 그래. 어쨌든 이제 이 집은 내 거다. 한 달 뿐이지만.
키홀더에 카드키를 꽂았다. 객실 안의 전등이 착착 켜진다.
1층은 침실을 뺀 모든 방의 용도가 몰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 쉽게 말하자면, 홈카페 겸 주방 겸 다용도실 겸 거실이라고 해야 할까. 한쪽 벽면에 차례로 각종 커피용품과 찻잎이 가지런히 정리된 선반과 상하부장을 공유하는 싱크대와 조리기구 - 냉장고 - 세탁기가 놓여있다. 반대쪽 벽면엔 4인용 패브릭 소파가 있고, 중앙엔 소파 길이만큼의 우드슬랩 테이블이 있다.
소파에 한 번 앉아본다. 푹신하다. 가죽 소파처럼 앉을 때 어지럽게 구겨지는 소리도 안 난다. 앉거나 누울 때 내 몸을 꽉 안아주는 포근한 느낌. 난 이 느낌을 정말 좋아한다.
소파는 생각보다 낮지도 않았다. 우드슬랩 테이블에 맞춘 건지, 테이블을 소파에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테이블과 소파의 높이가 딱 적절해서 따로 의자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창문도 없고 1층에 가구가 이렇게 꽉 들어차있어 답답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빈틈이 없는 구조에서 안정감까지 느껴진다. 이대로 눈만 오래 감으면 잠이 들 것만 같이.
안 되지. 아직 2층을 보지 못했다. 한껏 무거워진 몸과 눈꺼풀을 번쩍 들어올렸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는 보지 못한 곳에 계단이 있었다. 계단 밑 공간은 또 책장으로 활용돼서 빼곡하게 책들이 꽂혀있었다. 집주인이라는 사람은 공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아주 징하다.
2층도 1층처럼 가구들로 꽉 찬 느낌은 아니겠지? 설마 2층까지 그렇다면 그건 실망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2층을 본 순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