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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17. 2024

1일차. 체크인하기 - (8)

2층의 면적은 1층과 같았지만 훨씬 넓어보였다. 1층만큼 가구가 없어서일 것이다. 한눈에 봐도 퀸에서 킹 사이즈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침대에 하얗고 뽀얀 색의 침구가 잘 정리되어 있었고, 1층 테이블의 절반만 한 아담한 사이즈의 원목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엔 예쁜 탁상 조명과 노트북 한 대가 간단하게 올려져 있었다.


2층은 그게 다였다. 다만.


다만. 2층의 천장 전체가 창문이었다. 빗물이 고이지 말라고 사선으로 경사진 천장이, 그게 다 창문이라니. 아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천장이 아예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천장에 난 창문이었기에 당연히 열 수는 없었다. 주의사항에 굳이 창문을 열지 말라고 써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위치에 터무니없는 크기의 창문이었다. 근데 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따 밤이 기대된다. 이런 시골이면 별도 많이 보일 텐데, 그걸 염두하고 이렇게 창문을 낸 게 당연하다. 밤하늘을 이불 삼아 멍하니 구경하다가 잠이 들면 그 잠이 얼마나 맛있을까.


책상 옆에 짐을 대충 던져놓고 침대에 냅다 몸을 던졌다. 비명을 질렀다. 너무 편해서. 안 그래도 안 프로가 침대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얼마나 좋은 침대인지 벼르고 있었다. 합격이다. 여느 5성급 호텔 침대 뺨친다. 이불의 감촉도 너무 알맞게 부드럽고, 매트리스도 딱 적당하게 푹신했다. 침대도 넓어서 이리저리 뒹굴어도 한참 남았다.


침대에 녹아내린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한다.


"너무 좋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내뱉은 말인데도 이 방에 누군가 다른 이가 있는 것처럼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봐봤자 아무도 없었지만 괜스레 주변 공기의 눈치를 봤다.


침대에 똑바로 누워 창문을 올려봤다. 아주 살짝의 어둠을 머금은 하늘에 구름이 드문드문 떠있고,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구름은 어디를 향해 흐르고 있을까. 구름을 타면 세상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창문 밖으로 벗어난 구름을 나는 절대 잡지 못하겠지. 그러니 구름을 타면 내가 가고 싶은 어디든 걱정 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냥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구름을 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에도 나라가 있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늘나라를 가기 위해서도 여권이 필요할까. 나는 그 여권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 땅에 있을 자격조차 없는 내가 그토록 근사할 하늘나라에 갈 자격은 있을까.


눈이 감긴다. 하늘을 봐야 하는데. 점차 내리깔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을 구경해야 하는데. 눈을 뜨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자꾸 눈이 감긴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다.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 오늘 하루쯤은 잠시 내려놔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아직 내겐 29일이 더 남아있으니까. 딱 오늘 하루만 아무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걱정 없이 시간을 버리고 싶다.


아, 맞다. 커피 다 못 마셨는데... 커피, 그 맛있는 커피는 오늘만 공짜인데...


그렇게 희례는 잠들었다. 이불도 덮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눕지도 못한 채로 잠에 들었다.


하얀 문의 펜션 곳곳이 웅성거린다. 꼭 누구에게 무언가를 알리려는 듯이 공기가 소곤거렸다. 고요한 일렁임이 펜션을 가득 메웠다.


펜션의 하얀 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한 남자가 펜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내 희례가 사장님이라고 불렀던 이가 아니었다. 아주 새로워서 희례조차도 아직 만나지 못한 이 낯선 남자는 아주 최소한으로 문을 열어 빠르게 들어왔고 벌레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빠르게 문을 닫았다.


그의 등장에 전자레인지에 불이 띵- 들어왔고, 커피포트 버튼이 딸깍였고,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의 손엔 얼음이 다 녹아 색이 옅어진 커피가 담긴 컵이 들려있었다. 희례의 커피였다. 그는 컵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곧 그의 시선이 문 옆에 달린 메모보드에 닿았다. 그가 미소 지었다.


"여기에 체크한 손님은 처음이네. 그래서 다들 신났구나."


남자가 메모보드의 리셋 버튼을 꾹 누르자 단번에 글씨가 모두 지워졌다.


"내일 할 일은 누가 써보실래요?"


누구에게 건네는 말인지 대답하는 이 하나 없었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지간히 안 프로 마음에 든 손님이었나보네. 여길 직접 다 빌려주고. 중요한 손님이라고 했으니까 모두들 잘 부탁드려요."


거실 주변을 돌아다니며 물건 하나하나를 정성껏 쓰다듬는다. 그의 손길을 탄 물건들이 저마다의 빛을 깜빡거렸다.


"불 꺼주세요."


그의 말에 일순간 펜션의 모든 전등이 꺼졌다.


"블라인드 쳐주세요."


또, 그의 말에 2층 천장 창문의 블라인드가 천천히 내려오며 창문을 가렸다. 펜션이 어두워졌다. 오직 가전제품들의 표시등만 겨우 반짝일 뿐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1층 천장 말고는 아무것도 보일 리가 만무했지만 그는 마치 2층에서 곤히 잠든 희례를 바라보듯 정확한 시선으로 2층을 올려다봤다.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다.


"좋은 꿈... 정말 좋은 꿈을 꾸길 바라요, 박희례 씨."


이 말을 남기고 남자는 다시 하얀 문의 펜션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저마다 빛을 내고 있던 가전제품들이 하나둘 전원을 끄기 시작했다. 전자레인지도, 커피포트도, 스프링클러도, 무엇이든. 그리하여 펜션은 완벽히 어두워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희례는 모른다. 그저 모른 채 잠에 들었다. 그래도 된다.


시간이 지나 밤이 되고, 자정을 지나 새벽이 다가올 때 메모보드에 형광색 글씨가 꾹꾹 새겨졌다. 펜을 든 이도, 그 누구도 없이. 그것이 이 하얀 문의 펜션, 요정펜션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하는 첫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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