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내 INAE Oct 21. 2024

2일차. 아주 오래 산책하기 - (1)

잠을 잘 자야지 키도 크고, 피부도 좋아지고, 예뻐지고, 하루를 시작할 에너지를 충분히 충전할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잠은 어차피 죽어서 실컷 잘 건데 이승에서 잠자는 시간을 잘 쪼개어 나의 목표를 이루며 발전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들도 한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잠을 자면 잔다고 난리. 잠을 안 자면 안 잔다고 난리들이다.


잠을 자는 내가 시대에 뒤처진 사람 같고, 또 잠을 자지 않고 버티고 있자면 그럴수록 몸과 정신이 무너지는 걸 그대로 느껴버려. 어느 쪽으로든 내가 이토록 나약하기만 한 사람이라는 걸 인생에 반을 반드시 차지하는 잠으로 느끼는 게, 내가 정상인가.


잠은 내게 그랬다. 오늘 하루의 무게로부터 도망치는 도피처가 되었다가도 현실로 일어나지 못한 채 꿈에서 허덕이는 늪이기도 했다. 잠을 자면 백이면 백 모두 꿈을 꿨다. 꿈이 너무 재밌었다. 나의 꿈은 늘 그럴듯했고, 꿈이기에 잃을 것이 없어서 나는 꿈속에선 항상 당당했다. 어쩔 땐 초능력을 쓰기도 했고, 어쩔 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기도 했다.


꼭 원하는 대로만 꿈이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는 꿈을 꾼다 해도 어차피 꿈이니까 깨면 그만이라는 안전지대가 마련되어 있어서 악몽을 꿔도 좋았다. 악몽조차도 내 꿈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꿈. 나만의 세상.


하지만 현실에서의 난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꿈에서 일어난 일은 내일 꾸는 꿈에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 저질러버린 실수가 내일의 최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오늘의 난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꿈을 자주 꾸는 걸지도 모른다. 더 꿈을 꾸기 위해 더 잠을 자고, 더 잠을 자다 못해 일어나고 싶지 않은가 보다. 나는.


그런데 어제는 꿈을 꾸지 않았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겪는 단잠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침대가 좋아서일까. 이 집이 좋아서일까. 그냥 다, 라고 하자. 안 프로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런 집을 펜션으로 내어줘서. 창문을 열 수 없어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 오로지 내 숨과 심장박동만으로 가득한 이 꿈같은 밀실에서 그야말로 맛있게 잠들었다.


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만 있고 싶었다. 여전히 눈은 뜨이지 않는다. 눈을 뜨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렇게 만 있고 싶다.


근데 내가 불을 언제 끄고 잤더라.









꿈을 꾸고 있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머리는 깼는데 몸이 안 깬 채 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주위가 점차 밝아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속도만큼 느리지 않았다. 커튼을 걷는 속도? 아니, 그보단 줄을 당겨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는 정도의 속도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털실 한 가닥만큼 들어 올려 봤다. 흐릿한 초점에도 서서히 천장이 열리는 게 보였다. 아, 창문이었지. 그럼 저기 혼자 알아서 잘 올라가는 저 블라인드는 누가 걷고 있는 걸까. 블라인드가 맞나. 블라인드를 치고 걷는 줄 같은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자동으로 블라인드가 올라간다고 해도 이젠 놀랍지도 않다. 시골 펜션치고는 최첨단 시스템을 고루 갖춘 이 요정펜션에서 시간 맞춰 자동으로 치고 걷히는 블라인드가, 이 건물에 딱 하나 그것도 천장 하나를 통째로 뚫은 창문에 달려있는 건 어쩌면 당연할 지도.


어쨌든 눈이 부시다. 이불로라도 눈을 가리려고 더듬거리니 그제야 내가 이불도 덮지 않고 꼴까닥 잠에 들었다는 걸 알았다. 실실 웃음이 났다. 어젯밤을 다 날렸네. 그런데도 단잠을 잤다며 기분이 좋은 꼴이라니. 나도 참 나다. 주섬주섬 이불 속으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집어넣었다. 이불이 무겁다.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이불이 참 부드럽기도 해서 짓눌리는 느낌이 싫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1층이 소란스럽다. 투닥거리는 소리. 누구들의 대화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체 모를 물건들이 서로 투닥거리는 소리. 긁는 소리인가. 스윽스윽- 몇 번을 그렇게 무언가를 긁더니 어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현관문이 열리는 부피가 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문이 분명히 열렸고, 그를 반증하듯 탁탁거리며 발이 작고 가벼운 걸음소리가 들려온다.


탁탁탁탁- 어째 많이 들어봤으면서 처음 들어보는 발걸음이다. 무슨 신발을 신어야 이런 텅 빈 딱딱한 소리가 들리는지 머릿속 데이터를 열심히 돌리는 사이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를 듣고서야 생각났다.


사람의 발소리는 무겁고 뭉툭하고 바닥을 꾹꾹 찍어내는 소리다. 게다가 아무리 펜션이어도 신발은 벗고 들어오기 때문에 딱딱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마 발톱을 한 십 년은 길러야만 걸을 때 탁탁- 소리가 나겠지?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건 많이 가볍고, 경쾌하다. 무엇보다도 저 걸음의 주인은 발이 네 개다.


걸음은 침대에 가까워져 좀 더 빠르게 뛰더니 이내 폴짝- 엄청난 무게감이 침대에 뛰어올라 내 몸에 딱 붙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내 머리에 코를 갖다 대어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익숙한 듯 침대에서 제일 넓은 자리를 찾아간다. 제자리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빙빙 돈다. 자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침대 위를 앞발로 슥슥 파내듯이 긁고는 다시 빙빙. 그렇게 한참을 돌고서야 자리에 풀썩 앉았다.


펜션 밖에서 희미하게 어떤 남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곰탱아! 곰탱이, 어디 있어!


곰탱이. 아주 당연하게 침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버린 이 뭉텅이가 바로 곰탱이었구나. 꿍싯거리는 엉덩이가 정확히 옆으로 돌아누운 내 배와 허벅지 사이 품에 쏙 들어왔다. 오랫동안 고심해서 선택한 자리가 썩 마음에 드는지 머리를 내려 엎드린다. 그리곤 한숨을 푸욱- 쉰다. 이불이 없었다면 저 한숨이 내 얼굴에 바로 닿았을 것이다.


어제 사장님이 하시던 말씀을 곱씹어봤다. 내가 배정받은 이 펜션이 안 프로가 사는 집이고, 곰탱이가 자주 들어와서 개털이 있을 수 있다고 하셨다. 강아지. 분명 강아지라고 하셨다. 시골에서 집에 들이는 ‘강아지’라고 해봤자 푸들이나 포메라니안 같은 소형견이거나 조금 커봤자 웰시코기나 다리가 짧은 똥개밖에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장님네 귀여운 강아지를 언제고 보게 된다면 이리저리 쓰다듬고 껴안고 있는 대로 뽀뽀해 줘야지 몰래 마음먹은 참이었다. 분명 두 발로 서 안간힘을 써도 내 무릎 언저리밖에 오지 않는 사이즈를 상상했다.


이렇게까지 엉덩이가 큰 ‘강아지’가 어딨는가. 아무리 반려동물을 키워본 역사가 없는 나라도 이 엉덩이 사이즈라면 그냥 네 발로 서도 내 허벅지에 머리가 닿을 것 같고, 두 발로 서면 사람인 줄도 알 정도의 대형견이라는 건 안 봐도 안다. 애초에 이불로 가려져 있는데도 남다른 골격이 느껴지는 걸 봐라. 이불을 내리고 안 프로가 아닌 내 정체를 보여주면 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까? 죽으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체크인한 지 꼬박 하루도 안 지난 지금은 안 된다.


밖에서 곰탱이를 찾는 남자의 목소리가 이 안까지 들어와주기를 기다리기엔 슬슬 온몸에 쥐가 나듯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주인이 아닌 사람의 얼굴을 보고 놀랄 개의 돌발행동에 내 목숨을 지켜줄 만큼 이불이 충분히 두껍길 바라야겠다.


조심히, 아주 천천히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을 내렸다. 아직 머리카락만 보일 텐데 그래도 좋은지 곰탱이의 엉덩이가 신난 꼬리 덕에 덩실거리는 게 느껴졌다. 자고 있는 주인을 깨운다고 괴롭히지도 않고 침착하게 엎드린 채로 꼬리만 흔드는 개라니. 유튜브로 본다면 점잖은 강아지라며 얼마든지 예뻐해 줄 수 있는데. 조그만 화면에서는 어떤 초대형견도 손바닥만 하잖는가.


이불을 눈까지 내리고도 질끈 눈을 감았었다. 그래, 쫄았다. 동네 산책할 때나 지나치면서 힐끗 본 게 인생에 개를 접한 경험의 전부인데 지금 내가 얼마나 무서울지 아무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주인과 아침 인사를 할 생각에 잔뜩 설레 요동치던 어떤 개의 꼬리가 일순간 싸늘하게 멈췄다. 차분히 내려놨던 머리도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갑자기 달라진 개의 몸짓에 생존본능이 샘솟은 나는 눈을 팍 떴다.


털이 아주 뽀얗게 하얀 진돗개의 황갈색 눈동자가 어리둥절하며 커지기 시작했다. 너무 늑대처럼 생긴 개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냄새를 맡는다.


최선을 다해 숨을 참았다. 모르겠다. 왠진 모르겠는데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을 너무 해서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꿀꺽-


세상에서 가장 큰 목넘김 소리가 펜션 안을 가득 울렸다.


진돗개의 동공이 빠르게 확장됐다. 진돗개가 벌떡 일어났다. 이 개를 누워서 올려다봐서 그런지 생각했던 모습보다 더 커보였다.


“워워워워워!!!!!”


목청이 하도 남달라서 아주 우렁차게도 짖는다. 보통 도시에서 듣는 고막이 찢어질 것 같지만서도 살짝은 가소롭기도 한 소형견의 하이톤이 아니었다. 아주 낮고 단단해서 온 동네의 땅과 숲을 구석구석 울리는 짖음이다. 태어날 때부터조차 강아지일 수 없는 늑대의 후손다운 ‘개’의 목청.


주인도 아닌 사람이 주인의 침대에 누운 것도 믿을 수 없고, 낯선 사람의 옆에 순진하게 누운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데 그래서 분명 주인이 아닌데 주인이라고 생각해버린 인간의 존재가 계속 의심스러워 시선을 내게 고정하며 짖는다. 내가 처음 본 사람이란 걸 아주 정확히 인지해버린 다음엔 침대를 내려갔다가 또 뛰어올르며 짖고, 또 내려가서는 방을 구석구석 분주하게 돌면서 짖는다. 주인이 아닌 사람과 몸을 맞댄 게, 주인이 아닌 사람의 기상을 온 설렘을 다해 기다렸다는 게 저리도 억울한지 눈물까지 흘리는 것도 같다.


내게서 가장 먼 지점의 방구석에서 진돗개가 멈췄다. 거기서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곰탱이가 휘저은 공기 중에 먼지처럼 하얀 털들이 눈처럼 내린다. 개도 나도 숨을 죽였다.


“워워워워워!!!!!”


역시나 나의 존재를, 주인의 부재를 받아들이기는 짐승에게 너무 힘들었던지 다시 짖으면서 결국 계단을 내려갔다. 너무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길래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곰탱이를 계속 찾아 외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 08화 1일차. 체크인하기 -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