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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24. 2024

2일차. 아주 오래 산책하기 - (2)

“곰탱아! 안 프로도 없는데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반신반의했는데, 역시나. 남자는 사장님이 아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고, 보다 젊었다. 남자 덕분에 곰탱이는 진정이 됐는지 짖음이 잦아졌다. 불안하게 동동거리는 발소리는 여전했지만 그것도 차츰 진정되는 중이었다.


사실 이쯤에서 내 감정엔 아무런 요동도 치지 않았다. 막상 몸 위에서 짖어대는 늑대의 후손을 보면서도 참 겁이 많은 아이구나 싶은 마음뿐이었다. 많이 짖은 개들이 겁도 많으니까. 오히려 내가 움직이거나 어떤 소리라도 내서 이미 겁이 잔뜩 난 개에게 더 겁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난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었지만 이 진돗개에게선 날 공격하려는 기미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면 어쩌려고,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겁이 너무 없어서 짖는 종류였다면 어쩌려고 그랬냐고 해도 할 말은 없겠다. 어쨌든 난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다. 다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겁을 줘버려 미안했고, 누군가에겐 사랑스럽기만 할 반려견에게 대차게 차여 조금 서운하기까지 했다.


“나가자. 산책 가야지.”


곰탱이가 잘 진정됐는지 남자가 말했다. 곰탱이의 발소리가 펜션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면서 도어락이 작동되는 소리를 끝으로 펜션은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안도의 한숨이 포옥-


잠깐만. 근데 저 남자는 뭔데 남의 펜션에 그냥 들어왔데?


갑자기 화가 났다. 어이도 없었고. 안 프로도 알고 곰탱이도 아는 사람이라면 관계가 어떻든 간에 펜션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운영하는 관계자일 터. 그러니까 펜션 문을 열 수 있는 카드키도 가지고 있겠지. 근데 그럼 다인가? 관계자가 여분의 키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손님이 떡하니 있는 객실에 마음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짐승의 습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이 긴박한 상황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들어올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적어도 노크도 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먼저 물어봐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내가 아는 펜션 운영자라고는 사장님뿐(안 프로는 목소리만 들었으니까)인데, 생판 보지도 못한 저 남자가 관계자인지 나와 같은 손님인지, 도둑인지 괴한인지 변태인지 누가 알아. 안 그런가?


진짜다. 저 남자가 일단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 펜션의 문을 열 수 있는 카드키를 가지고 자유롭게 드나든다니. 이건 말이 안 된다. 항의해야겠다. 심장이 뛴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러고보니 계단 한 칸 한 칸마다 꺼끌꺼끌한 미끄럼 방지 스티커가 붙여있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어쩌면 네 발 달린 식구가 무사히 계단을 오르내리게 한 센스 있는 배려일 수 있겠다. 안 프로에게 이런 면이… 아니, 다시 집중해서.


머리로는 벌써 곰탱이와 함께 산책길에 나선 누군가의 등을 돌려세워 뭐라고 몰아붙여야 할까, 이 길로 안 프로한테도 잔뜩 따져 어제의 복수를 시원하게 수행해야지 하며 시뮬레이션을 신나게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들뜨다 못해 흥분하기까지 했던 마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현관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누군가의 형상에 지레 놀라버려 자칫하면 계단에서 내가 구를 뻔할 정도로 크게 휘청거렸다.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양복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본다.


“괜찮으세요?”


하얀 셔츠에 조끼와 바지를 남색으로 맞춘 셋업 정장이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은은하게 빛을 냈다. 조끼의 단추색과 같은 버건디 색 넥타이를 정리하던 남자가 계단에서 휘청이는 내게 바지주머니에 찔러넣었던 두 손을 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내가 넘어질까봐 대비하는 그 손바닥에 왠지 절대 닿지 말아야 할 것만 같다는 일말의 의무감이 생겨 최선을 다해 몸의 중심을 다잡았다.


지금 내 모습이 되게 이상해 보일 것 같다. 마치 마네킹이 혼자 뒤뚱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아 선 꼴이겠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가 참는다고 하는데도 참을 수 없어 씰룩씰룩 웃고 있지 안 그러겠나.


웃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본인이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입을 막고 헛기침을 하길래 말았다.


아니, 사실. 저 얼굴을 보는 순간 화를 낼 이유를 모두 싹 잊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취향을 들은 창조자가 단 하나의 요소도 빠짐없이 손수 빚어 내게 보내준 한정판 조각품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이 살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보길 바랐던 이상향 그 자체라니.


들이쉬는 숨보다 내쉬어지는 숨이 더 길고 깊어졌다. 눈에 힘이 풀린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이 느낌이 바로 황홀경인 건가, 이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괜찮은 거 맞아요?”


자기 얼굴을 보면서 넋을 잃은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남자가 날 걱정스런 얼굴로 살피며 물었다. 젠장. 목소리도 너무 내 취향이라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생시야. 눈꺼풀을 사정없이 깜빡거렸다. 정신 차려야지. 이대로 더 정신을 놨다가는 이 남자가 내게 무슨 짓을 해도 저항 한 번 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당해주겠다.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겠어. 안 된다. 절대 잊지 마. 아직 한 달 중 하루도 채 있지 않았다. 한 달치 숙박비는 내 목숨값이다. 이 한 달만큼은 돈 한 푼 아깝지 않게 살아야지.


“누구세요?”


낼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냈다. 그마저도 약간의 음이탈이 있었지만 모르는 척 당당하게 고개를 바짝 들어올렸다.


남자는 대답 대신 나를 잠시 지그시 바라봤다.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마음속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아주 살짝 벌어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말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요정펜션 관리실장입니다. 곰탱이를 찾고 있었는데 이 안에서 곰탱이가 짖는 소리가 들려서.”

“아……”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관리실장이라. 이 남자는 그럼 안 프로와 무슨 사이일까? 사장님이 안 프로의 아버지라고 했으니까 가족끼리 경영하겠지. 보기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그럼 안 프로와 남매 사이일까? 어쩐지 사장님께서도 연세에 비해 잘생기셨다 했더니 유전자의 이로움에 박수를 치고 싶다. 그렇다면 안 프로도 이만큼 예쁘다는 건데… 그건 좀 싫을 지도…


“많이 놀라셨구나.”


질문에 답도 안 하고 있으니 남자가 시무룩해져서는 말했다. 내 속마음을 누가 알 턱이 있겠냐마는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한 걸 들키기라도 한 듯 뻘쭘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내 모습이 멋대로 방귀를 뀌어놓고 괜히 성을 내는 것처럼 보여도 별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생긴 남자를 눈앞에 두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라.


“그래도 엄연히 손님이 있는 객실인데 마음대로 들어오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네,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곰탱이가 겁이 많아서 누굴 물지는 못하긴 한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설마 다치셨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진짜 괜찮으신 거죠? 다행이에요…”


내가 안 다쳤다는 말에 이렇게나 안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나. 키도 나보다 한참 더 크고 딱 벌어진 어깨가 셔츠로도 가려지지 않는 장정이 두 손을 꼼지락대면서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모습에 조금이라도 단단하게 먹었던 마음이 햇볕 아래 아이스크림마냥 녹아내렸다. 하마터면 “문단속 안 한 제 잘못이에요”라면서 무릎이라도 꿇을 뻔했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내가 이런 적이 없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이해가 안 된다.


“개는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설마 개가 카드키를 띡 대고 들어온 건 아닐 거잖아요.”

“여기 문 아래쪽에 강아지 문이 있어요. 원래 손님 카드키로 출입하면 강아지 문은 안 열려야 하는데 이게 왜 열렸지…”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보니 정말로 현관문 아래쪽에 희미한 사각형 선이 그어져 있었다. 문이 온통 하얀색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희미한 틈이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슥슥 긁는 소리가 바로 곰탱이가 발로 문을 열려고 휘적이다가 난 발톱 소리였다.


아침부터 주인 얼굴 보려고 문 앞에서 기웃기웃거렸을 곰탱이의 모습이 상상이 돼서 귀엽고, 앞다리를 들어 서면 나랑 키가 비슷할 것처럼 덩치도 큰 애가 문 하나를 마음대로 못 열어서 애쓰는 모습이 또 상상이 돼서 귀엽다. 너무 귀여워서 시무룩해질 정도로.


“문은 제가 손 볼게요.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네. 안 물렸으니까 괜찮겠죠, 뭐.”


말하면서도 무슨 말이냐며 속으로 자책했다. 물렸으면 어쩔 뻔했냐? 그래도 괜찮다고 할래? 근데 이 남자 앞에서라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괜찮다고 하겠다. 그냥 모든 게 다 괜찮다고만 말하고 싶다. 응. 나 자신, 설득 완료.


또다. 남자가 날 또 지그시,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번엔 그 시선이 꽤 길게 이어져서 슬슬 무서워지려고 했다. 눈으론 남자를 바라보면서도 몸이 저절로 뒤로 물러나졌다.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어색한 침묵이 흘러 그냥 먼저 펜션을 나가버릴까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기려던 그때 남자가 움직였다.


팔짱을 끼더니 벽에 등을 기댄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안하다며 잔뜩 움츠러들었던 여린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날 내려다보는 눈빛만으로 주변 공기를 무겁게 깔아내린다. 속눈썹 숱이 많고 길다. 그 틈으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낮게 깔린 눈동자가 검다. 코로 마신 숨이 입으로 내쉬어지며 목소리를 실어 내게 왔다.


“나 잘생겼어요?"


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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