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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Oct 31. 2024

2일차. 아주 오래 산책하기 - (4)

아침 일곱 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컨테이너 앞에 손님들이 있다. 이리저리 깔린 통나무 토막들, 그마다 한 자리씩 앉은 노인들이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상상 속의 노인들은 귀여웠다. 내 상상 속 노인들은 지금처럼 전부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으니까.


세 명의 노인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마치 눈빛만으로 날 발가벗기듯이 내 온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핀다. 노인들이 젊은이를 저토록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흔하게 경험할 수 있다. 관찰 또는 구경의 대상이 되는 경우라면 꽤 불쾌하지만 대개 그런 노인들에게 악의는 없다. 젊은이들이 산책하는 강아지나 유모차를 탄 신생아를 귀엽다며 쳐다보는 것과 같은 의도겠지.


문제는 난 지금 전혀 귀엽지 않다는 것. 나름 세수는 했어도 그게 다였다. 산발인 머리를 대충 묶어올렸고, 생각해보니 어제 펜션에 온 후로 옷을 갈아입지도 않아 구깃구깃해졌을 것이고, 아침에 한 세수 외에는 씻지도 않아서 사실 지금 냄새도 좀 난다.


지금이라도 다시 객실에 들어가서 씻고 나올까 싶었지만 이미 울타리 문을 열고 나와버렸고, 객실로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는 동안 벌써 컨테이너에 다 와버렸다. 노인들은 역시 날 쳐다보는 게 확실했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그들의 고개가 움직인다. 애써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했다.


뒤통수를 간질이는 웅성거리는 소리.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실 텐데 너무 작고 애매하게 말씀들을 하셔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에라 모르겠다. 컨테이너 창문을 열어 키오스크에나 집중했다.


노인 손님이 많아서일까, 글씨가 엄청 크다. 한 화면에 선택 버튼 네 개가 꽉 차게 띄워진다.


[식사] - [음료] - [생필품] - [관리자 호출]


[식사]를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 [무료 조식] - [한식/분식] - [양식] - [중식]이 뜬다. 오른쪽 화살표 버튼이 있어 누르니 새로운 버튼이 구성됐다.


[특별주문 : 원하는 메뉴] 호기심에 눌러보니 경고창이 하나 뜬다. <재료 수급을 위해 주문 후 6시간 뒤에 제공됩니다(18시 이후 주문 시 다음날 12시 이후 제공 가능). 그래도 주문하시겠습니까?>


글씨 한 자 한 자의 크기가 손바닥만 해서 경고창이 뜰 때 그대로 내 얼굴을 덮을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질 정도다. 어휴, 부담스러워라. 일단 경고창을 끄고 다시 왼쪽 화살표 버튼을 눌러 이전 선택지로 돌아갔다. 조식 버튼을 누르려니까 이번엔 다른 버튼들엔 어떤 메뉴들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구경해볼까?


"그거 못 눌러."


[한식/분식]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소란스러웠던 뒤통수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머리카락이 유독 검은 할머니께서 말을 이었다.


"아침엔 조식만 누를 수 있어. 한 번 눌러봐라?"


그렇게 말씀만 하셔도 누를 생각이 전혀 없어졌는데 꼭 내가 버튼을 누르길 바라시듯 기대에 찬 눈으로 내 손가락만 쳐다보신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왠지 그 기대에 부흥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얼떨결에 버튼을 눌러봤다. 창 하나가 뜬다.


<메뉴 준비 중>


3초 정도 떴다가 저절로 꺼진다. [양식]도, [중식]도 이어 눌러봤지만 똑같았다. [무료 조식] 버튼을 눌렀을 때만 화면이 바뀌었다.


"내 말이 맞지?"

"하하. 감사합니다..."


어색하게라도 웃으면서, 뭐에 감사한지는 몰라도 입에 붙은 버릇으로 말하니 이번엔 이끼색 비니모자를 쓴 할머니께서 말했다.


"참나, 좋댄다."


웃는 모습이 꼭 비웃는 것 같다. 확실하다. 왜 갑자기 시비야. 꼭 저렇게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이 있다. 어색하게 지었던 미소가 애매하게 죽으면서 얼굴 근육이 더 어색하게 구겨진다. 좋댄다. 좋댄다. 귓가에 이끼비니 할머니의 목소리가 맴돈다.


"니는 아침부터 입에 고추를 물었나. 왜 이렇게 매워?"

"나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서 고추 말린 걸 걷었지."

"이번엔 잘 말렸어? 작년에 건조기 온도가 너무 높아서 고추가 아주 씨꺼매가꼬 방앗간에서 한 소리 들었잖여."

"쩝. 올해 것은 색깔이 아주 그냥 앵두먀냥 뽀-얘. 방앗간 김 사장이 코를 올해 반드시 납작하게 만들어 줄 거여."

"김 사장 코가 안 그래도 없다시피 헌디 더 납작하게 해줬다가 고 마누라한테 혼나."

"애먼 집에 고추 잘못 놓을 일 없으니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검은머리 할머니와 이끼비니 할머니, 그리고 금테 안경을 쓰신 할머니께서 뭐가 그리 재밌으신지 꺄르르- 꺄르르. 날 선 말씨에 기분이 상한 것도 잠시, 아침 햇살만큼 싱그럽게들 웃으시니 별 것 아닌 마음이었는지 사륵 풀렸다.


벌컥-


그때 컨테이너 문이 열렸다.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사장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기에 컨테이너 문이 열릴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해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이 전부여서 금방 납득했다.


"희례씨 왔어요?"


전부의 손엔 원목으로 된 샤리통이 쟁반처럼 들려있었고, 그 위에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는 믹스커피 5잔이 종이컵 사이즈의 투명 머그컵에 담겨 있다. 가만. 초박 만들 때나 쓰는 밥통인 샤리통이 여기 있는 게 이상했다. 메뉴에 일식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또 가만. 전부는 내게 말하면서 할머니들께 커피 한 잔씩 나눠드리고 있다. 할머니는 세 분이신데, 커피는 왜 5잔일까. 설마 내 것인가 싶었지만 전부는 그 자신이 커피를 마시지도, 나한테 커피를 건네지도 않고 피크닉 테이블 위에 샤리통을 올려놓고 그 자리에 앉았다.


"왜 주문 안 하고 있어요? 지금 배 안 고파도 주문해요. 포장도 해주니까."

"아. 지금 하려고요."


어차피 몇 발자국만 가면 객실이 있는데, 그럴 거면 굳이 포장하지 않고 이따가 주문하면 안 되나. 하지만 이 의문은 속으로만 삼켰다. 생각해보면, 나야 한 달을 묵는 손님이니 포장 여부가 중요하지 않겠지만 보통의 손님들은 하루 내지 이틀 묵고 가는 게 전부일 텐데, 무료인 조식을 안 먹고 가긴 아깝고 그렇다고 먹기는 싫고 그럴 수도. 그럼 체크아웃할 때 포장해 갈 수도 있겠다. 음. 납득.


일단 얼른 주문해야지. 오랜 시간 키오스크를 조작하지 않아서 벌써 초기화면으로 돌아갔다. 다시 [식사] 클릭. [무료 조식] 클릭.


[빵.잼.버터] - [브런치] - [아침백반] - [간편식]


오호라. 생각했던 것보다 메뉴 구성이 알차다. 무료고 포장이 가능하다고 하길래 빵에 잼이나 시리얼이 전부라고 생각했지. 아침백반은 신기한데. 나였어도 안 먹더라도 바득바득 포장은 해가겠다 싶다.


지금 당장 이것저것 눌러 상세한 구성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여덟 개로 늘어난 눈동자가 내 뒤통수를 뚫을 듯이 쳐다보는 게 보지 않고도 느껴져서, 그리고 오늘은 간단하게 빵이 먹고 싶어서 [빵.잼.버터]를 선택했다. 뭐가 또 주르륵 펼쳐진다.


[오늘의 빵] - 통식빵

[잼, 버터 : 다중선택 가능] - ㅁ 딸기잼 ㅁ 포도잼 ㅁ 사과잼 ㅁ 땅콩버터 ㅁ 버터 ㅁ 코코넛오일

[음료 : 택 1] - ㅁ 아메리카노 ㅁ 카페라떼 ㅁ 믹스커피 ㅁ 우유 ㅁ 주스 ㅁ 콜라/사이다 ㅁ 선택 안 함

[음료 세부사항] - ㅁ 뜨겁게 ㅁ 차갑게 ㅁ 얼음 추가 제공 ㅁ 선택 안 함


별 거 없는 것 같으면서도 선택사항들이 꽤 세부적이다. 빵은 매일 달라지는 건가? 설마 직접 만드나? 잼이랑 버터는 다중선택해도 된다니 그럼 다 달라고 하면 정말 다 주나? 음료를 만약에 주스나 콜라/사이다로 선택해놓고 뜨겁게 해달라고 해버리면 진짜 그렇게도 주나?


"뭘 고를지 모르겠어?"


언제부터 서계셨는지 검은머리 할머니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말하셨다. 나보다도 키오스크에 가까우시다.


"내가 추천해줄까? 내가 여기 음식 다 먹어본 사람이거든."

"아, 네. 좋아요."


홀린 듯 대답해 놓으니 할머니께선 내 몸을 아예 살짝 밀어 키오스크와 독대를 하신다. 익숙하면서도 공격적으로 키오스크 화면을 두드리신다.


"여기 통식빵에는 딸기잼에 버터가 잘 어울려. 커피 마시나? 아이스로?"

"네, 뭐. 커피... 아이스... 네."

"우유 먹지?"

"네, 네."

"그럼 카페라떼 마셔. 아이스로다가."

"아니, 이것 봐."


이번엔 나와 검은머리 할머니 사이를 이끼비니 할머니가 비집고 들어오셨다.


"어제 온 거 아녀? 처음 먹는 거잖아, 그치?"

"아, 네..."

"그럼 그냥 다 선택해부러. 어차피 공짠데 다 먹어보라 해. 그리고 식빵엔 그냥 우유가 더 어울려."

"쉰 소리 말고 앉아있지? 내가 다 먹어보고 골라주는겨. 여서 커피만 마시는 니가 뭘 알어!"

"내가 뭘 몰라! 다 알어!"


내 밥인데... 할머니 두 분이서 키오스크를 연신 두드리며 티격태격하시는 통에 괜히 키오스크가 아프다며 신음하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중재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싸움이 커지는 것 같은데... 전부를 돌아보니 그는 익숙하다는 듯 내게 어깨만 으슥해 보였다. 그리고는 역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는 신난 표정으로 할머니들을 구경하고 앉았다.


어쩌나 싶은 순간, 내 손목을 잡아오는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계속 앉아만 계시던 금테안경 할머니가 내 손목을 슬금 당기셨다.


"괜찮아. 앉어. 저 할망구들 귀가 잘 안 들려서 그래, 싸우는 거 아니여."


세월을 머금어 무겁지만 얼버무리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 미소를 받아 정갈하게 자리 잡는 주름 한 결마다 우아하고 고우시다. 젊으셨을 때 남녀노소 불문하고 온 사람을 휘어잡았을 매력이 느껴져 별다른 저항 없이 할머니 옆에 앉아버렸다. 잘린 통나무가 너무 낮아서 하마터면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래도 잘 앉았다.


"아가씨는 언제 가려고?"

"저 한 달 있다가 가요."

"그래?"


내 말에 놀랄 부분이 어디 있었나 곱씹어볼 정도로 꽤 크게 놀라시던 금테안경 할머니는 이내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이 아가씨 한 달 있다가 간대!"


그때까지도 아가씨가 아침부터 찬 거 먹으면 안 된다, 아가씨 먹고 싶다는데 아이스로 시켜주라며 싸우시던 두 할머니가 싸움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셨다. 이끼비니 할머니가 먼저 움직여 자리에 도로 앉으셨다.


"진작 말하지, 쯧. 먹을 일도 많은데 그럼 오늘은 니가 알아서 혀."


내 아침 메뉴 선택권을 비로소 쟁취한 검은머리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싱글벙글, 엉덩이가 실룩샐룩, 키오스크를 두드리는 손길이 흥겹다. 그 뒷모습을 보며 덩달아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금테안경 할머니도, 이끼비니 할머니도 웃었고, 주문을 마치고 마치 춤을 추듯 덩실거리며 자리에 앉은 검은머리 할머니도, 컨테이너 안에서 주문을 받았다며 띵동- 소리가 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는 전부도 웃었다.


바람이 분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건지, 기분 좋은 내가 이 바람마저 좋게 받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기분이 좋았다.


웃음이 사그라들고 주위가 조금 조용해졌을 때, 이끼비니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근데 아가씨는 실장 총각이 별로 마음에 안 드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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