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몇 신지도 모르겠다. 몇 번째인지 모를 시계소리가 정각을 알리며 댕- 댕- 댕- 1층에서부터 울려 2층 계단을 손수 올라와 침대에 누워있는 내 귓가에 인사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다시 조용해진 펜션 안. 편안한 침대에 누워 공기의 흐름마저 소리로 들릴 듯한 적막을 이불 삼아 덮은 나. 나는 숨을 아주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하루가 겁나 기네."
아차차. 내쉰 숨에 불순물 같은 말이 섞여버렸나. 하기사. 평소와 같은 시간에 평소처럼 집에 있었다면 지금 이맘때쯤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을 텐데, 아침부터 뭔 일이 복작복작 많이도 일어난 것 같은데 아직도 저녁이 아니라니. 오후가 지난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다.
게다가 잠도 안 온다. 이만큼 배부르고 등도 따뜻하고 기분도 좋은데 이때가 딱 낮잠 자기 좋은 타이밍 아닌가. 평소의 나였다면 느즈막한 아침을 빙자한 이른 점심을 먹고 바로 누워서 달큰한 낮잠을 누렸을 것이었다. 뭐 먹고 바로 누우면 소가 된다던데 그래서 내 몸이 이렇게 비대해졌다고 뭐라해도 난 몰라.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는데. 지금도 이곳에서의 첫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바로 누웠는데, 뭐, 어쩌라고.
참. 이 집, 빵 잘하더라. 오늘의 빵 : 통식빵 말이다. 단언컨대 절대 어디서 사 온 빵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식빵이긴 하다. 정육면체에 윗면이 조금 동그랗게 솟아오른, 자르지만 않았을 뿐인 전형적인 통식빵. 근데 이 식빵의 진가는 두 손으로 잡고 반으로 주욱 찢었을 때 돋보인다. 찢는 즉시 김이 모락모락 피어 퍼져 나오면서 고소한 빵냄새가 폭발하고, 찢기는 결이 야들야들해서 당장 얼굴을 파묻고 싶을 정도였다.
보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아서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무작정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식빵 겉껍데기 부분에는 고소한 우유향이 향긋하게 풍겨오고, 씹을수록 식빵 사이사이의 결들이 서로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이 쫀득쫀득했다. 얇게 찢어먹으면 금방 사라져버리니 감질나고, 그렇다고 왕창 집어 입 안 가득 넣어 먹고 싶은데 그러면 빵이 금방 없어져버리니 아껴 먹느라고 혼났었다.
'잼도 먹어봐요. 이것도 다 수제예요.'
잼. 이끼비니 할머니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검은머리 할머니는 통식빵에는 딸기잼과 버터가 잘 어울린다고 그렇게만 시켜주실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결국 내 쟁반 위에는 모든 종류의 잼과 버터가 아담한 사이즈의 소분병에 담겨있었다.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그라미를 만든 만큼만 한 작은 병에 하나하나 담겨있으니 내가 마치 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좋은 의미는 아니고, 무료라서 이렇게 조금 주는 건가 싶었지만 지켜보고 있던 전부가 말했다. 잼은 리필도 된다고. 오.
잼은 특별히 맛있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사 먹는 잼 특유의 혀 이곳저곳을 마구 때리는 단맛이 없었다. 수제잼이라고 하면 기대하는 건강한 맛이랄까. 그정도로 과육 본연의 맛 선에서 최대로 끌어올리려 노력한 티가 났다. 무엇보다도 빵과 너무너무 잘 어울렸다. 특히 딸기잼과 버터를 같이 발라먹었을 때, 환상. 물론 다른 잼과 버터들도 싹싹 긁어먹어 설거지도 필요 없이 식기들을 비워버렸다.
카페라떼는 화룡정점이었다. 순수한 우유가 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이끼비니 할머니는 말씀하셨지만 이번만큼은 검은머리 할머니의 손을 들어드릴 수밖에 없었다. 우유의 든든한 고소함 끝에 시원하고 깔끔한 커피가 입에 남은 아침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어제도 느꼈지만 이 펜션은 커피가 정말 맛있다.
내 생각이지만,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에 원두를 다르게 쓴 것 같았다. 아메리카노의 커피는 견과류와 초콜렛의 묵직한 바디감만 있는 구수한 맛이었다면, 카페라떼에는 오히려 과일류의 산미가 느껴졌다. 웰컴 드링크로서 호불호 없이 누구에게나 부담스럽지 않았던 아메리카노. 다른 음식과 함께 마시면서도 커피만으로도 온전히 맛을 즐길 수 있었던 카페라떼.
'우리 사장님, 안 프로가 이런 거 좋아해요.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거. 손님들에게 사소한 것까지 정성을 들이는 거.'
전부가 떠오른다. 빵은 물론 잼과 버터를 다 긁어먹고 라떼까지 쭉쭉 들이켜 얼음만 짤랑이던 때까지 전부는 가만히 내 맞은편에 앉아 흐뭇하게 쳐다만 보더라. 배가 든든해져 모든 식기를 내려놓았을 때 전부가 말했다.
나는 전부에게 물었다. '실장님은 그런 안 프로를 좋아해요?'
전부는 웃었다. 여러 번 들어서 익숙해 보였다. '좋아하죠. 너무 인간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며 덧붙였다.
'안 프로 임자 있어요. 유부녀예요.'
'그 임자가 실장님은 아니고요?'
'설마. 나는 총각이고.'
점차 안 프로의 갖은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어렴풋한 인상이라는 게 머릿속에 그려졌는데, 유부녀라는 말을 듣고 거의 확신했다. 안 프로는 최소 40대 이상의 아줌마라고. 안 프로...님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차올랐던 묘한 반항심과 질투심이 사르르 녹아내린 순간이었다. 성공한 아줌마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멋있기도 하다. 나도 참 나다.
'그래서, 나는 진짜 희례씨 취향이 아니에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묻던 전부. 저 미소에 남편과 아이들을 둔 강남의 유부녀가 끔뻑 넘어가 별 지랄을 다 한 모양이지. 그 '지랄'이 대체 뭐였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안 프로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유부녀라면서 허우대 멀쩡한 젊은 남자를 알바랍시고 자기 집에 두면서 남편 몰래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까.
전부의 얼굴이야 내 취향이긴 하다. 너무 내 취향이라 문제라면 문제.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서 아무 감정도 안 든다. 하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얼굴을 보고 감탄이 나오더라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서 몰래 숨어서라도 지켜보고 싶다거나, 옆에 있고 싶어서 주변을 기웃거린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은 들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편했다, 전부는.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도, 오랜만에 만나도 바로 어제 봤었던 것처럼 익숙하고 편한 친구 같달까. 이상하지. 내 인생에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전혀 없는데. 그래서 나답지 않게 장난처럼 대답했다.
'무당이셨다던 할머니는 실장님 얼굴이 없다던데요? 없는 얼굴에 취향이 웬 말이에요.'
이 말을 하자마자 곧장 후회해버렸다. 내내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전부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껏 불었던 바람이 일순간 싸늘하게 느껴졌다. 내가 해선 안 될 말을 했나보다 하고 뻘쭘해졌다. 이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장난을 안 치는 거다. 내가 장난만 치면 분위기를 망치니까. 내가 그렇지.
다시 뻘쭘하다 못해 부끄러운 마음이 심장을 쥐어짜기 시작한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도무지 누워있을 수가 없다. 상체를 일으켜 앉다가도 벌떡 일어서 서성여 보지만, 전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가봐요.'
그 말을 남기고 내가 다 먹은 빈 식기류를 묵묵히 치우는 전부의 모습을 보면서 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몰라 앉은자리에서 엉덩이만 들썩이는 내게 전부는 애써 다시 웃어보였지만 그 웃음을 짓는데 아주 많은 힘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슬픈 걸까. 착잡한 건지, 서운한 건지. 서운하다면 버스 할머니께 서운한 걸까. 아니면 그 자신의 어떤 면에 실망한 걸까.
안 되는 건 안 된다. 뭐가? 전부의 얼굴이? 저렇게 잘생긴 얼굴도 누군가에겐 없느니만 못한 얼굴로 보이나보다. 내가 저런 얼굴을 가졌다면 내 얼굴 보라면서 인적이 붐비는 곳에서 아침부터 새벽까지 돌아다니겠다. 이런 아무도 없는 시골 마을에 왜 숨어있어, 당장 연예인이든 인터넷 방송인이든 유명해져서 일확천금을 벌고 싶지.
복에 겨웠구만. 안 되는 게 어딨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나보다며 상심할 사람은 나 같은 사람만 해도 된다.
나 같은 사람...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린다. 서성이던 걸음이 멈춰진다. 내 숨소리뿐인 고요한 집에서 고개를 한껏 젖혀본다. 절대 눈물을 참으려는 게 아니다. 어제 처음 이곳에 왔다가 보고 감탄했던 천장 가득히 낸 유리창. 그를 통해 보는 하늘이 유난히 파아랗고 맑다. 어떤 아이가 솜사탕을 먹으면서 한두 꼬집씩 날려보내는 듯 아슬아슬한 구름이 흩뿌려져 있다.
그런 구름을 보며, 저런 구름이라면 함부로 붙잡았다가 그나마 있는 것도 부서져 사라지면 솜사탕 주인에게 호되게 혼나겠다고 걱정부터 드는 게 나 같은 사람이다. 언감생심 잡을 생각 따윈 하지 말아야지. 젖혔던 고개를 다시 숙인다. 창문을 통해 스미는 햇볕이 따사롭다. 따갑다. 버겁다. 분명 아침에 블라인드가 걷히는 걸 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블라인드를 걷거나 치는 줄이든 버튼이든 뭐든 찾을 수 없다. 1층에 있나? 1층으로 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1층 식탁 위에 떡하니 놓인 대갈통 머그컵. 어제 웰컴 드링크라고 받았던 커피잔이다. 내가 저걸 가지고 펜션에 들어왔었던가? 기억에 없다. 분명 사장님께 펜션을 소개받으며 들어왔을 때 짐가방 말고는 빈손이었던 것 같은데. 설마 귀신?
예끼. 귀신이 컵을 어떻게 들어. 왜? 아예 커피를 귀신이 만들어줬다고 하지? 참나. 기억 못하는 사이에 내 손에 들려있었나보지. 어제 정신이 없어서 몇 모금 마시지 못해 커피가 아직 한참 많이 남아있었지만 이걸 지금 또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나라도 여기서까지 뚜껑도 없이 방치되어 먼지가 둥둥 뜬 커피를 어떻게 마시나.
반납하러 가야지. 컵에 든 커피를 우선 개수대에 버리고 물로 대충 헹군 뒤 밖으로 나가...려는데 현관문 옆에 걸린 메모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 ㅁ 아주 오래 산책하기 >
바뀔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이제와 자세히 보자 타이핑이 아니라 손글씨로 쓰여있다. 최대한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한 글씨. 나는 아니니까 그럼 누구의 글씨일까? 아침에 곰탱이를 찾으러 들어왔던 전부가 그 사이에 썼을까? 아니면 사장님?
아무래도 대갈통 머그컵을 돌려주면서 한 번 더 강하게 말해야겠다. 엄연히 돈을 지불하고 이 집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집주인이어도 마음대로 들어오지 말아달라고. 컴플레인을 걸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고 부끄러워졌지만 이건 꼭 말해야겠다. 말해야 된다. 여긴 내 집인 걸? 돈 낸 동안은.
입술을 앙 다물어 다짐을 단단히 하고 펜션을 나섰다. 공기의 냄새가 좋다. 산뜻하고 깨끗하다. 이게 도시와 단절된 시골마을만의 묘미인가. 나간 김에 산책도 하고 올까? 산책하기 좋은 날씨이긴 하다. '아주 오래'라면 얼마나를 말하는 걸까? 긴 시간을 말하는 걸까, 긴 거리를 말하는 걸까. 적어도 펜션으로 돌아갔을 때 네모칸에 당당하게 체크할 수 있을 정도는 돼야겠지? 이게 뭐라고 왜 설렐까.
컨테이너 앞에 섰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사장님의 픽업트럭도 없이 주차장이 텅 비어있다. 생각해보니 아침에도 차는 본 적이 없었다.
똑똑똑- 컨테이너 창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식기 반납 창문을 열어 컵을 넣고 다시 창문을 닫을 때까지도 컨테이너 안에서 사람이 나오기는커녕 인기척 비슷한 건 들리지 않았다. 컨테이너 안에서 전부가 자고 있나 싶어 문가에 귀를 바짝 대봤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장님네 집 쪽에서 자갈을 밟는 발걸음이 들렸다. 몰래 컨테이너 안 소리를 도청하는 모양을 들키지 않으려 얼른 몸을 떨어뜨리며 모르는 척 주위를 둘러본다.
발걸음은 가까워졌지만 그게 사장님이나 전부라면 분명 무슨 말을 할 텐데 발걸음의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둥 뒤를 걸어다녔다. 의아해 뒤를 돌아본다.
곰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