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장 깊이 사랑했다

eunparang

by 은파랑




우리는 가장 깊이 사랑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한 채 가장 깊이 사랑했다.” 한강, '소년이 온다'의 문장이다.


이 문장은 조용히 가슴을 내려앉게 한다.

‘눈을 피했다’는 건,

말하지 않았고, 표현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장 깊이 사랑했다’고 말한다.

보지 못했지만, 외면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다는 역설

이는 한강이 '소년이 온다'에서 끌어낸

침묵 속 사랑, 죄책감과 연민, 말 없는 헌신의 미학이다.



광주의 비극 속

폭력의 그림자 아래

사랑마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들이

오히려 가장 깊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품었던 이야기

말하지 못했기에 더 진실하고

외면했기에 더 오래 남는 마음


사랑에는 때때로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

눈빛도 무겁고

손끝도 떨리는 날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모든 형식이 완성되기도 한다.


너를 사랑했지만

차마 너를 바라보지 못했다.

네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뜨거운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혹은

내 눈 속의 죄책감이

너에게 번질까 두려워서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해 앉았다.

바람 부는 창가

가만히 엎드린 손등 위에

햇살 한 조각이 내려앉았을 뿐

하지만 그 순간조차

우리는 침묵으로 서로를 감쌌다.


그건 회피가 아니라

차오르는 감정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너를 마주 보는 일이

세상의 비극을 다시 꺼내는 일이 될까

숨을 죽이며

곁에 머물렀다.


사랑은 꼭 말을 걸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눈을 피한 채로도

끝내 닿지 못한 손끝으로도

그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소리 없이 다짐했고

아픔을 짊어진 채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는 자주 그날의 뒷모습을 생각한다.

네가 나를 보지 않던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가장 선명하게 사랑받고 있었다.

그리고

너를 향한 나의 사랑 또한

그때 가장 깊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한 채

그러나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한 생애를 건 사랑을 했다.


은파랑




은파랑 콘텐츠 에세이 '토닥토닥' 출간

https://myip.kr/ueU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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