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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Nov 09. 2023

초록의 시간 614 철부지 하얀 꽃

서로의 아침을 배웅합니다

철부지 하얀 꽃 한 송이를

오늘의 선물로 받았습니다

철이 없고 철을 몰라 그런지

백치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투명하고 고운 흰빛이 애잔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아침마다 비슷한 시간에

동네 한 바퀴를 돌게 되는데

늘 같은 길을 가지 않고

조금씩 다른 길을 골라 갑니다

그래서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아침 풍경과 만나게 됩니다


아이들 학교 가고

꼬맹이들 유치원과

아가들 어린이집 가는 시간이라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배웅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은 철부지 하얀 꽃처럼

입동 지난 추운 날씨에 반바지를 입은

철부지 청년 아빠를 만났어요

젊은이라 열정 가득해서인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서도

유모차를 밀고 가는 모습이

어찌 그리 씩씩하던지요


그래도 아빠는 아빠라서

유모차에 실린 꼬맹이의 꼼지락 손이

옷소매 밖으로 나오는 걸 보고는

멈추어서 꼬맹이의 손 추울세라

옷소매 안으로 넣어주는 모습이

듬직하고 차분해서 보기 좋았습니다


발에 깁스를 한 아빠가 절뚝절뚝

귀여운 꼬마아이를 어린이집 차에 태우며

빠이빠이~부지런히 손 흔들어

여행이라도 보내듯 배웅하는 모습도 

애틋하면서 기특해서 재미납니다


초등학교 근처까지 차를 태우고 와서

딸아이를 내려주고는 함께 차에서 내려

멋 내느라 짧은 반바지 입은 딸아이를

살며시 안아주며 춥지 않으냐고

걱정하는 아빠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철부지 딸내미는 흥칫뿡~ 달아나며

매정하게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주 배웅하다 말고

사진 찍어준다며 손가락 V를 하라고

스마트폰을 들이대시는 장면 속에는

깊고도 지극한 사랑이 묻어 있으나

철부지 꼬맹이는 손 시리다고 투덜대며

꼬부라진 V자를 그리다 말아요

손주의 투덜거림과 상관없이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십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돈 버느라 바빠서 미처 누리지 못한

다정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손주 배웅하며 새삼 느끼시는 듯

얼굴에 햇살 주름 한가득

참 즐거워 보이십니다


철부지 꽃송이 같은 아이들

조금씩 철들어가는 부모들

철들기에 이미 늙어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모두가 한 송이

곱고 사랑스러운 꽃들입니다

서로의 아침을 배웅하고

함께 할 저녁을 기다리며

순간순간 철들며 나이 들어가는

철부지 하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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