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빛의 흔적
그날 저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와 나는 각자의 소설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엄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였고, 나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였다.
나는 책 속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엄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다. ‘시공간은 원통형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하늘과 땅이 맞물려 하나의 원통이 되는 그림을 그려가며, 3차원 존재가 4차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는 나와 함께 우주의 신비를 탐험하다가 문득 지구의 번뇌로 돌아왔다. 본능적 소외감, 짓눌린 열망, 끝없는 피로감, 무력한 체념. 이야기의 마무리는 여느 때와 같았다. “내가 해주는 이야기, 다 소설 소재 되겠네.”
사실 나는 늘 엄마의 고단한 현실과 내밀한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엄마의 감정이라는 태풍을 피해 달아나기만 했다. 하지만 이날은 태풍 속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눈을 감고, 빗줄기가 피부를 찌르는 아픔을 견디며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태풍의 눈에 도달했다. 주변에는 폭풍이 몰아치는데 그 중심만은 기이하게 고요한 곳. 흔들림 없이 엄마의 마음속 소용돌이를 바라볼 수 있는 안전한 곳.
그때 깨달았다. 엄마는 그 모든 태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강함이 나를 지금까지 살게 한 양분이었고, 그것을 먹고 자란 나는 또 다른 힘을 키웠다. 태풍의 눈 속으로 엄마를 데려올 수 있는 힘.
나는 사사로운 인간사 자체가 아닌, 기저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을 알고 싶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닌, 우주의 근원적 진리를 탐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선택했다. 어떤 이에게 이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마치 동굴 속으로 숨어든 것처럼.
하지만 내게는 정반대였다. 바깥의 세계야말로 플라톤이 말한 그림자에 불과했고, 오히려 책과 사유로 가득한 내 동굴 안에서 나는 진정한 실재를 만나고 있었다. 감각이 보여주는 피상적 현실을 넘어, 내면에서 이데아의 세계를 발견해가는 여정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이 동굴을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세상의 거센 바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둥지처럼 보였지만, 실은 무한한 우주로 향하는 문이었다. 나는 그 동굴 속에서 오히려 더 자유롭게 날갯짓했고, 진리의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엄마는 알았을까? 그녀가 지켜준 이 고요한 공간이 내게는 가장 넓은 세계였다는 것을.
감사와 함께,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모래시계 속 알갱이들이 서서히 바닥을 향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모래가 좁은 목을 통과하며 위에서 아래로 모이듯, 단편적이던 사고들이 흐르고 모여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로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닌, 질문 자체를 품고 사유하는 여정을 즐겼다. 우리가 죽으면 무엇이 남을까? 우리의 존재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형태는 변해도 본질은 남는 것.
존재를 물리적 형태로만 본다면, 죽음은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재를 우주의 눈으로 본다면, 죽음은 모래시계가 뒤집히는 순간처럼 또 다른 흐름의 시작점이다. 이 생각은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더 선명해졌다. 우주라는 거대한 모래시계 속에서 별들은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빛나는 모래알 같았다.
별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거대한 항성, 은은한 백색왜성, 금세 사라지는 유성까지. 모양은 달라도, 그 핵에선 같은 원자들이 반응하며 빛을 낸다. 우리 인간도 별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빛을 발한다. 누군가는 손길로, 누군가는 말로, 누군가는 침묵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방식은 달라도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같은 본질, 사랑이 불타오른다.
별이 수명을 다하면 핵의 원소들이 흩어져 우주의 새로운 씨앗이 되듯, 사람이 떠나도 그가 남긴 사랑은 다른 이들의 영혼에 새 생명을 피워낸다. 별빛이 수억 광년의 어둠을 건너 마침내 우리 눈에 닿듯, 사랑은 시간의 심연을 넘어 누군가의 가슴속에 별처럼 살아남는다.
이것이 내가 두려움 속에서 발견한 위안이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유한하지만, 우리가 나눈 사랑은 끝없이 이어진다. 엄마가 내게 준 사랑은 내 안에서, 그리고 내가 다른 이에게 전하는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별이 내뿜은 사랑의 파편이다.
그 파편이 당신의 마음에 작은 별자리를 이루길,
이내 별빛이 당신 안의 우주를 환히 밝히길,
마침내 별의 기억이 새로운 사랑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
<우리가 별이었을 때> 작품 소개 - 한창 별과 우주에 꽂혀있던 2025년 3월 집필한 작품이다. 칼 세이건의 유명한 명언 “우리는 별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 문장에서 출발한 상상력이 솟아올랐다. "내 몸에 있는 별의 조각이, 자신의 고향별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리고, 같은 별에서 온 조각들끼리 서로를 알아보고 끌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어떨까?" 부산청년잡성장카페 프로그램을 통해 다듬고 또 다듬어서 공동출판했다. 부끄럽지만 용기내어 세상에 내놓는 나의 첫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