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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날

내 머리도 잠시 전원을 끄고 싶다.

by 은연주



나의 아기 강아지가 중성화 수술을 했다. 모처럼 연차를 썼다. 회사 들어와서 처음으로 쉬었다. 일부러 부모님 댁 근처 동물 병원으로 골랐다. 아이를 병원에 맡기고 부모님과 점심 식사를 했다. 동생도 내가 온다고 휴가를 맞춰서 썼다. 오늘 휴가를 쓰기 위해 어제 열두 시 넘어서 퇴근했다.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 새벽이었지. 이게 맞나. 엄마는 계속 회사를 그만 두라 성화고 아빠는 그래도 버텨야 된다고 난리다.


우울증을 어떻게든 빨리 극복하려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취업한 건데 결과적으로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절대 그럴 수 없는 사이클이다. 남편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것도 억울하고 공백 없던 커리어에 갑자기 1년의 빈틈이 생겨서 연봉에 손해를 본 것도 어이가 없고, 그보다 남들 앞에서 공개 처형 당하려고 결혼식을 올린 사실도 화가 난다. 내가 3년 동안 헛된 곳에 사랑을 쏟아부었다는 것에 분노가 치민다. 이혼했다고 하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보는 한국 사회에서 내 잘못 없이 안 그래도 상처받은 마음에 이혼 자체로 흠집이 나버린 것 같은 현실이 증오스럽다.




회사 다니기 전에는 그저 너무 슬프고 아프기만 했다.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며 하루종일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약을 먹어도 우울감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했다. 장난으로라도 살기 싫다, 죽고 싶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백날천날 명랑한 나였다. 그때는 정말 늪에 빠져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주로 늘 슬펐고 잔잔하게 때때로 죽고 싶었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뭔가 악에 받친 사람처럼 화가 많아졌다. 그건 분명 지금 이 타이밍에 이만큼 과하게 일하는 건 내게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는 뜻 같다. 일하는데 우울증이 지장을 주진 않는다. 나는 생활력 강하고 독하다. 하지만 일하는 게 우울증 치료에 큰 반작용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 마지막 인간미까지 탈곡기에 탈탈 털어서 쥐어짜는 기분이다. 이렇게 정서적으로 메마를 수가 있을까. 이만큼 마음이 냉랭하고 신경이 날카로웠던 적이 없었다.




아빠는 그래도 여기서 회사를 그만 두면 네가 정말 더 지는 거라고. 길동이 때문에 정말 니 인생만 버리는 꼴이라고. 이겨야 한다고 했다. 이대로 회사를 다니는 게 이기는 걸까. 영화 보면 다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 많은데. 나도 다 버려도 되는데 지금 뭘 위해 이렇게 아득바득 애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 나 그냥 회사 그만두고 집 앞 카페 같은 데서 생활비로 150만 원 정도만 벌면 안 돼? 이 집에 있는 것도 싫어. 전세 빼고 싶어. 모든 연 다 끊고 한국 떠나고 싶어.


니가 왜 떠나. 니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도 안 받고 어딜 가. 정신 차려. 너 그러면 진짜 큰일 나는 거야. 회사 다녀. 이 회사가 안 맞으면 이직을 하더라도 무조건 회사 다녀.


아빠 내가 병원에서 의사랑 상담할 때마다 자꾸 꾹꾹 참고 빙빙 돌리면서 말하니깐 선생님이 토해내래. 자기 앞에서는 숨기지 말고 다 말을 해야 치료에 도움이 된대. 어차피 환자 개인정보는 보호된다고. 그래서 말했어. 아빠가 누구고 시댁이 누군지. 선생님이 듣더니 화내더라. 어른들이 지금 자식 다 망치고 있는 거라고. 시댁 진짜 미안한 태도 맞냐고. 어른들 체면 지키느라 쉬쉬하고 가만히 있으면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냐고. 더 망가지는 건 연주씨래. 내 인생에 엄마 아빠도 믿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더라. 더 이상 시댁 이해해주지 말고 부모님 체면 생각해주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라도 싸우래. 그래야 내가 낫는대.

선생님이 감정적으로 군 게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웠어. 근데 맞는 말 같아서 할 말이 없었어. 맞는 말인데 왜 대답도 못했지. 아빠 나 오빠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어차피 나한테 진심으로 미안하지도 않을 사람이잖아. 내가 못 죽으면 차라리 오빠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내 마음은 편할 것 같아. 아빠 딸 진짜 괴물 됐지. 내 마음이 이 정도로 썩은 게 나도 너무 싫고 무서워. 내 상태가 더 계속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




아빠는 처음으로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 말대로 엄마 아빠의 태도 역시 나를 계속 망치고 있는 걸까. 정신과 의사가 잠시 이성의 끈을 놓고 인간답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내가 겪은 일이 정말 보통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겠다. 엄마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못된 애한테는 니가 먼저 웃으면서 손 내밀고 악수하라고, 그게 이기는 거라고 했다. 누가 너를 괴롭히고 없는 말을 지어내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고. 침묵하라고 가르쳤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증명해 준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읽은 책들도 그런 비슷한 말을 많이 했다. 공자 왈 맹자 왈.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가 성숙하고 지혜로운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그럴 그릇이 아닌가 봐. 나는 엄마 아빠를 하나도 닮지 않았나 보다. 내 그릇이 작아서 이렇게 힘든 게 비통하다.




강아지 중성화 수술은 잘 됐고 아이는 아파서 힘이 없다. 항상 나만 보면 꼬리를 흔들고 좋아죽던 아이였는데. 우울하고 지친 나에게 한없이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던 강아지가 지금은 나처럼 힘없이 축 처져있다.


수술을 핑계로 회사를 하루 쉬었더니 숨이 더 잘 쉬는 것 같으면서도 머리는 오히려 더 복잡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더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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