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우울은 그런 것
어제부터 이틀연속 내리 집에서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는 중이다. 원래 TV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지라 태어나서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본 적이 아직 없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노희경 작가를 존경한다. 친구는 스무 살 대학생 처음 만났을 때부터 노희경 작가를 무지 좋아한다고 줄곧 말해왔다. 그녀야말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데. 친구는 내 결혼식을 위해 축사를 써줬다. 그런 친구가 제일 존경하는 드라마 작가라고 하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꼭 볼 참이었다. 마침 약속 없는 이번 주말이 드라마를 몰아보기엔 딱이었다. 연기 차력쇼에 가까운 배우들의 열연과 따뜻한 OST, 푸른 바다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옴니버스 형식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주행 하기 좋았다.
그러다가 배우 신민아가 연기한 민선아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다시 내 우울도 시작됐다. 브린텔릭스로 애써 꾹꾹 눌러 닫은 우울이었는데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민선아의 우울이 나를 현실직시시켰다. 온몸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겁고 시간 개념이 흐려져서 시계가 나만 빗겨나가는 것 같은 기분. 엄마 아빠를 보러 가기로 한 오늘이었지만 우울감이 나를 지옥 입구까지 끌고 가서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소파에 누워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멍하니 드라마만 쳐다봤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우리들의 블루스>만 봤다. 당연히 밥은 걸렀고 마음속 괴물이 시키는 대로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아이스크림이나 빙수 따위만 배달시켜 입에 처넣었다.
오늘은 엄마가 나 몸보신을 시켜준다고 장어 사주마 했던 날이었다. 내가 집에 가지 않자 엄마 아빠 동생에게 차례차례 연락이 왔다. 응이라고 답장을 쓸 기력도 없어서 ㅇ이라고만 겨우 보냈다. 동생이 건 전화를 받고는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날 따라 울던 동생은 화장을 고치고는 한 시간 뒤쯤 남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우리 동네에 와서 내게 소고기를 사줬다. 지난번 딱 한 번 지나가는 길에 인사만 했던 사이였다. 동생 남자친구가 잠시 화장실 갔을 때 슬며시 물어봤다.
- 니 남자친구가 내 상황, 나 결혼한 거 알아?
- 아니 아예 아무것도 몰라. 언니 미혼인 줄 알아. 회사 때문에 자취하는 걸로 알아.
이 우스꽝스러운 질문과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이 얼마나 답답한지. 왜 이걸 나만 감당해야 하는지. 동생 남자친구와 고기를 먹고 집에 와서 <우리들의 블루스>를 마저 봤다. 평생 보지도 않던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뒤로 수많은 옛날 드라마를 도장 깨기 하듯 정주행 했다. 매일 집에 틀어박혀 넷플릭스만 하염없이 뒤적거리고 있는 이 시간이 그저 빨리 지나가길.
그간 나는 인격을 지키기 위해 홍길동의 치료에 차도가 있기를 바랐고 그의 안녕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럴수록 우울은 내 목숨줄을 가지고 고무줄놀이라도 하듯 나를 우습게 여긴다. 고로 나는 우울이 영원히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더라도, 내 영혼마저 썩어버리더라도 그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겠다고. 죽을힘을 다 해서 너를 저주할 거라고. 이혼하고 마침내 남남이 돼도 항상 니가 있는 곳을 향해 침을 뱉고 썩은 내 진동하는 증오를 모아 너에게 살을 날릴 거라고.
- 길동이가 많이 아프잖아.
- 아픈 게 뭐? 그래서 나는 죽어도 돼? 걔가 아프면 다야? 그게 사람이야?
나를 달래는 애꿎은 아빠를 향해 울분만 토해낸다. 정작 그의 부모한테는 따지지도 못하면서 만만한 우리 아빠만 붙잡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내가 너무 싫다.
홍길동이 무릎 꿇고 빌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고개 숙인 니 뒤통수에 똑같이 칼을 꽂을 거야. 니가 내게 한 것처럼. 하지만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착하고 좋은 사람인 척하던 니가 동태눈깔의 괴물이라는 걸 안 순간 이 세상엔 기적도 희망도 없다는 걸 같이 알아버렸거든. 그러니 나를 얼른 버려. 어서 버려. 악몽을 꿀 게 뻔해서 오늘도 쉽게 잠을 잘 수 없다. 계속 리모컨만 의미 없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하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우울이 나를 집어삼키고 난 고작 이렇게 드라마로 도피하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