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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정신과는 누가 가나?

오죽 원망스러우면 이런 생각까지 드네.

by 은연주

며칠을 고민하다가 돈을 두 배로 내고 유병자 암보험에 가입했다. 이렇게 큰 충격과 스트레스를 겪어보니 분명 몸도 망가졌을 게다. 이미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계사들은 암보험 심사는 우울증 약과 상관없다더니 심사에 결국 탈락했다. 이미 만기 된 실손보험 역시 우울증 치료가 끝난 뒤에 5년 기다렸다가 가입해야 된다. 그것도 억울한데 어디 크게 아픈 적도 없는 내가 순식간에 유병자로 낙인찍혀버렸다.


1년 전에 했던 마지막 건강검진에선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다고 나왔는데. 이제 그런 기록은 모두 쓸모없어졌다. 8개월째 복용 중인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는 고작 숟가락 뜰 힘만 만들어준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지도 않고 옛날의 내 모습으로 변신시켜주지도 않는다. 약은 약일뿐이다. 약에 의존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약을 함부로 끊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치료는 온전히 치료자의 영역이다.


3개월 이내 의사로부터 진찰 또는 검사를 받고 의료행위를 받은 적이 있는지? NO

3개월 이내 마약, 혈압강하제, 신경안정제, 수면제, 각성제(흥분제), 진통제 복용 여부 YES

1년 이내 의사로부터 진찰 또는 검사를 받고, 추가검사(재검사)를 받았는지? NO

5년 이내 입원, 수술, 7일 이상치료, 30일 이상 투약 여부 YES

5년 이내 중대질환으로 인한 진단, 치료, 입원, 수술, 투약 여부 NO


보험 가입을 하며 고지를 하는데 울컥했다. 남편 때문에.. 남편 때문에... 너 개새끼 때문에....




행복하려고 한 결혼식은 하루아침에 내 세상을 뒤집어놨다. 남편의 치료와 관계없이, 이혼과 상관없이 나는 아직도 병원을 다니고 여전히 약을 먹는다. 나는 남편 때문에 동네 정신과를, 남편은 자기 때문인지를 몰라서 대학병원 정신과를 다닌다. 서로 연락은 안 하더라도 나란히 정신과를 다니는 것만큼은 참 사이좋은 부부 못지않다.


정신과에 진짜 가야 할 사람들은 안 가고 정작 그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마음을 다친 피해자들만 정신과를 찾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신과 의사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정말로 궁금해졌다. 대학병원 정신과는 대체 누가 다니는 걸까. 순전히 내 입장에서는 타인의 마음을 모르는 가해자는 대학병원에, 거기에 상처받은 피해자는 동네 의원에 다니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 우울이 지금보다 더 깊어지고 마음이 계속 썩어가면 나도 상급병원으로 옮길 수도 있다. 대학병원이 뭐 별 건가. 대학병원 정신과 진료를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악의도 편견도 없다. 단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남편이 원망스럽고 밉구나. 이렇게 또 한 번 내 마음을 자각한다.




오늘은 회사에서 많이 힘들었다. 사회 생활하면 으레 있는 상황들이었다. 폭탄 돌리기 하듯 쭉 돌리고 돌리다가 얼떨결에 총대를 메고 책임을 뒤집어쓰는 그런 일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회색 영역일수록 더 그렇다. 예전 같았으면 퇴근하고 남편과 맥주 한 잔에 닭다리 뜯으면서 흘려보냈을 텐데. 요가 매트 위에 서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육신의 찌든 때를 구석구석 뺐을 텐데. 다 옛날일이다. 난 이제 같이 뒷담 깔 남편도 없고 요가를 하지도 않는다. 어쩐지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라~ 하며 내 마음을 방어해야 하는데 그런 게 잘 될 리 없다. 퇴사하고 싶다. 이혼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우울증 약을 먹는 주제에 열심히 회사 다니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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