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밖에 없는 그의 세상에서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돈'뿐
자폐는 말 그대로 자기 세계에 갇혔다는 뜻이다.
남편은 이번 주에 풀배터리 검사를 앞두고 있다. 아마 자폐 성향이 의심되면 자폐 검사도 추가로 받겠지. 진단명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내가 겪은 사건을 통해 과거를 되짚어보니 나는 그가 분명 자폐 스펙트럼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우울증, 편집증, 강박증은 겉으로 드러나는 병리적 증상일 뿐이다. 제일 깊은 밑바닥에는 더 복잡한 이유가 뒤엉켜있을 것이다.
진단명이 성격 장애라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특정 성격 장애만 있다고 보기엔 연애 시절 그런 성격장애적 면모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서 무리가 있다. 남편은 연애 시절에 책임감 강하고 순수한 모습을 지닌 남자였다. 우직한 모습은 믿음직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기저에 깔린 더 큰 원인은 분명 자폐라고 생각한다. 내면에 감춰져 있을 인간관계에서의 좌절이나 소외감 등의 상처는 남편에게 건강한 자존감을 키워주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남편은 날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왔을지 모른다. 남을 속이기 위해서 쓴 가면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학습한 생존의 가면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돈에 집착을 했다. 시부모님도 남편이 원래는 안 그랬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최근 몇 년 간 특히 더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하셨다. 돈에 집착한다는 표현을 단순하게 돈 욕심이 많다거나 돈을 너무 밝힌다거나 속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돈에 '이상하게' 집착한다는 게 포인트다.
남편이 만약 없이 자란 사람이면 상식적으로 그런 모습을 충분히 이해해 볼 수 있을 텐데, 정작 그는 어려운 형편과 정반대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결혼식날 아빠가 내게 써준 편지에는 '너희 두 사람 부모님 슬하에 어려움 없이 자랐는데'라고 쓰여있었다. 솔직히 우리는 부모님의 지원을 많이 받았고 그동안 고생 모르고 살아왔다.
그래서 남편이 돈에 집착하는 모습은 조금 이상했다. 차라리 일관성 있게 돈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경제관념이 투철한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본 남편은 사회적으로 어른의 역할을 강요받을수록, 그래서 불안도가 높아질수록 점점 더 돈에 이상하게 집착했다. 연애 시절 내가 본 남편은 돈을 전혀 쓰지 않아서 돈이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돈 욕심이 아예 없는 사람이었다. 쇼핑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구멍 나서 솜이 다 빠져나오는 패딩을 10년 넘게 입었다. 옛날에 다 해진 베갯잇을 시어머니가 버리면 그걸 찾는다고 온 집안을 뒤집어놨었다고 들었다.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이 몹시 강했다.
하지만 또 평소에 먹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고 우리는 장 볼 때 좋은 식재료를 아낌없이 샀다. 둘 다 먹는 건 제대로 된 거 먹고살자는 주의였다. 여행 갈 때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 외국에 놀러 갔을 때 나는 1인당 350달러의 거금을 주고 20분짜리 해상 액티비티를 하는 게 돈 아까워서 망설였는데, 오히려 남편은 그런 데서는 쿨했다. 남편이 나를 설득해서 결국 우리는 20분에 700달러를 썼다.
하지만 그는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무척이나 뚜렷했다. '나'는 있는데 '우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1+1=2처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1-0=1처럼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가 계속 같이 살았더라면, 그는 계속 '나'로 존재했을 것이고 나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채 그에게 종속되었을 것이다.
다시 돈 이야기로 돌아와서, 당연히 남편 돈은 남편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결혼하면 부부는 경제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앞으로 같이 돈을 모으며 가정을 일궈나가는 가족 아닌가? 같이 잘 살자고 One team이 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돈으로 나를 통제하고 싶어 했다. 돈에 몹시 인색했다. 하지만 밖에서는 항상 돈을 되게 잘 쓰고 웬만하면 남들한테는 자기가 다 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게 더 이상했다. 자기 친구에게는 1억을 빌려줘놓고 나한테는 자기 자동차의 요소수값을 절반 내라고 1원 단위까지 청구했다. 자기 차를 같이 타고 여행 다녔으니 브레이크 패드 같은 소모품도 청구하는 게 원칙상 맞는 말이지만 그건 봐줬다고 선심 써서 깎아줬다는 듯이 말했다. 차라리 평소에 더치페이나 '무조건 반반!'을 외치는 사람이었으면 쩨쩨한 놈 징글징글하다며 혀라도 찼을 텐데, 또 그렇지도 않아서 더 이해되지 않았다.
몇 해 전 나는 생일 선물로 아이패드가 갖고 싶었는데, 남편은 아이패드가 '자기 기준에' 전혀 쓸모없다고 그것보다 100만 원은 더 비싼 맥북을 사줬다. 내게 왜 아이패드가 필요한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기준'으로 100만 원을 더 썼다. 남편은 이렇게 돈을 쓰는 기준이 이상했다. 평소에는 집안 곳곳에 잔돈이나 지폐를 흘리고 다녔고, 가계부를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늘 덤벙대다가 갑자기 꽂히면 엑셀 수식 오류를 잡아내는 컴퓨터처럼 꼼꼼해졌다.
내가 시어머니의 심부름을 했다고 남편은 갑자기 동태눈깔이 되더니, 순식간에 자기 세계에 갇혀 주야장천 이혼을 외치고 있다. 어쩌면 그는 불안한 내면에 이혼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혼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이혼하자는 대화의 시도도 없다. 자기는 변호사를 고용했다고 뻔히 들킬 거짓말을 쳤다. 이미 내게 소송을 걸었고 끝까지 가겠다고 주장하지만, 법원 ‘나의 사건검색’에 보이는 화면은 그가 아직도 소장 인지대 수납조차 하지 않았다는 내용 단 한 줄 뿐이다.
나의 부모는 조정이혼으로 내가 하루빨리 이혼하기를 원한다. 시아버지도 이에 동의하셔서 남편에게 소송 취하하고 조정이혼을 권했지만, 남편은 자기는 끝까지 소송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 소송은 돈도 안 내서 시작조차 안 했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불안을 돈에 기대서 달래려 하고 있다. 남편 나라에 남아있는 내 짐을 돌려주지도 않고, 나한테 갚을 돈도 절대 주지 않겠다고, 원래 내 것이었던 물건들의 아무것도, 단 1원도 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불안하고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남편은 사랑, 평화, 배려, 믿음, 화합 같은 말랑말랑한 감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세계는 0과 1, 이진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구두쇠라서가 아니다. 자기 세계에 갇혔기 때문에 바깥세상이 마치 외계처럼 느껴지는 본능적인 불안에 대처하는 자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가치일 것이다. 0과 1, 숫자로 이루어진 돈. 그래서 남편이 돈에 기이하게 집착할수록 나는 이제 그가 얼마나 깊게 자기 세계에 갇혀서 홀로 외롭고 불안한지 가늠할 뿐이다.
그는 내가 회사 다니는 걸 좋아했고 자랑스러워했다. 몇 년 전 내가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대기업의 이직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남편은 나보다 더 아쉬워하고 억울해했다. 나는 그런 남편이 당연히 공감능력이 있는 줄 알았다.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었나 보지~ 하고 바로 털어버린 나와 달리, 진심으로 너무 아쉬워하는 남편을 보며 그가 나를 이만큼이나 사랑하고 생각해 준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마 내가 돈을 버는 게 그에게 '자기 것'을 나누는 일, 책임감을 혼자 짊어지는 억울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토록 내 탈락이 아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내가 그의 낮은 자존감을 채워주는 트로피였거나.
왜냐면 남편은 내가 자기 때문에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외국에 따라 나갔는데, 그곳에 간지 보름밖에 안 된 내게 취업할 생각도 안 하고 게으르다며 매섭게 비난했다. 나를 취업 준비도 안 하는 한심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나는 입국 다음날부터 벌써 어학원을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결혼 전에는 평생 일할 거라더니 결혼하자마자 말이 바뀌었다고, 자기는 나한테 사기 결혼 당한 기분이라며 날뛰었다. 자신 때문에 내가 회사를 그만둔 사실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내 말이 바뀐 게 아니라 상황이 바뀐 거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커리어를 뒤로 하고 그를 온전히 지지해 주기 위해 따라간 외국행이었지만, 그에게는 내 선택에 바탕이 된 '사랑과 배려'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느새 나는 그에게 수입 0원짜리 기생충이었다. 외국에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손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자기 것을 나누는 것이 마치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제거 대상처럼 축출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