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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ug 23. 2023

타협이 없는 사람이 사는 법

  자정을 넘긴 시간이다. 생각이 담긴 글자와 문장을 읽는 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이제 자야지 하는데 배꼽 부근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꼬르륵. 결국 배꼽 주변에서 시작된 울림이 번져간다.



  참 신기한 일이다. 왜 여러 가지를 먹었더라도 쌀을 안 먹으면 배가 고플까. 오늘 하루동안 나는 커피 2잔, 토마토 샐러드, 맥주 200ml, 새우깡 1/3 봉지, 포도 20 여알, 소고기뭇국 한 그릇, 피노누아 반 병, 곁들인 크래커 2조각과 크림치즈 반 조각을 먹었다. 가짓수도 여러 개에 그 양도 적지 않다.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허기의 원인은 분명하다. 나는 오늘 쌀을 한 톨도 먹지 않았다는 것.



  저물어가는 여름의 저녁에 와인을 나눠마신 남편에게 물었다. 하필 시집을 읽은 직후라 내 마음이 평소보다 그윽해져 있었다.

  “남편, 사랑은 시시한 순간들에서 시작된대. 남편이 나에게 호감을 느꼈던 그 시시한 순간은 언제였어? “

  “소개팅 때 날개 원피스를 봤을 때, 뭐지? 이 여자! 하고 궁금했지.”

나는 십 년 전 10월의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 원피스에 달린 시폰 장식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남편의 시선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시시하게 웃었다.



  “남편, 나는 어떤 강점을 가진 것 같아? 나는 어떤 사람인 거 같아? “

나는 붉은 와인과 점점 울창해지는 여름 귀뚜라미 소리에 기대어 사춘기 소녀 시절 때나 친구들에게 물었던 어린 질문을 입 밖으로 던졌다.

  “강점? 음. 내가 보는 부인은 타협이 없는 사람이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



  타협이 없는 사람. 나는 아무리 이것저것 먹었어도 쌀을 먹지 않으면 배고파하는, 결국은 쌀이어야만 하는 내 위장을 닮은 사람이었다. 오늘 운명이 내 편이었다면 내일은 남의 편인 것처럼. 웃는 얼굴 덕에 사람을 얻었지만 그 덕에 쉽게 보여 사람에게 상처를 받게 되듯, 모든 성향은 단면이 아닌 양면이다. 그렇다면 타협이 없는 나는 덕분에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



  핀셋을 들고 내가 겪은 수많은 경험의 알알들 속에서 타협이 없었던 순간들만 골라내보고자 한다. 그럴수록 떠오르지 않아 눈을 감아본다. 나는 손에 라이트를 쥐고 내 마음속 심해로 잠수해 들어간다. 고요한 고독 속으로 도착한 후 현재를 사느라 가려져있던 나를 샅샅이 비춰보려 한다. 이제 막 1m쯤 내려갔다.

  "부인, 자?"

  "아니거든. 생각하는 거야."

  "아닌데, 그건 내가 잘 쓰는 수법이잖아. 눈 감고 잠 안 잔다고 하는 거."



  아, 이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 고독으로 들어가 울창한 생각들 사이에서 내 생각을 발견하고 엮어가기 위해서는 오롯한 나의 공간이 필요한 게 맞다. 소파에 반쯤 누워 눈을 감으며 내 안에 라이트를 켜자마자 "부인, 자?" 하는 소리에 나는 고독의 입구에도 못 들어간 채, 표지판만 보고 뒤돌아 나왔다.



  "무슨 생각하는데? 진짜?"

  "아까 남편이 했던 말 있잖아. 나는 타협이 없는 사람이라는 거. 내가 어떤 면에서 그랬는지, 그래서 내가 얻은 건 뭐고, 잃은 건 뭔지 생각하고 있었어."

  "아, 그래. 어렵지."

  "쉿, 소리를 줄여."



  선전포고를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내 손에 라이트를 쥐고 내 안의 심해로 들어가 본다. 무엇보다 내가 했던 선택들을 살펴본다. 언제나 말은 행동보다 쉬워서 내가 썼던 글, 문장, 했던 말보다는 내가 했던 크고 작은 선택들이 나를 보여주게 마련이다. 여지없이, 그리고 적나라하게.



  타협이 없던 선택을 살펴본다면, 여고 2학년 중간고사 때, 프린트물을 주로 보면 유리한데도 교과서로 공부해서 전체평균보다 낮은 점수가 나왔던 그때일까? 연봉이 오르는 것도 승진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는 데 공부하는 게 자연스럽다며 계속했던 모습일까?  사은품으로 받은 에코백이 아니면 명품가방 서너 개뿐인, 중간이 없는 소비성향일까?



  타협하지 않았던 순간을 발견하려 노력할수록 타협했던 순간들이 뒷면에 함께 붙어 나온다. 결혼 준비할 때, 좋아하는 그릇을 사기 위해 다른 지역까지 원정을 다니며 구입했던 나는 식기나 다른 도구들은 엄마가 사준 그대로 받았다. 당시에 인테리어에 몰두했어서 전체적인 컬러를 선정한 후, 적절한 벽지, 테이블, 가구는 고르고 골라 다른 지역까지 가서 구매했지만, 가전은 엄마께서 혼자 다녀오신 후 "오늘 가전 다 샀다." 그 말에 "응~엄마!" 하고는 어떤 가전이 들어오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타협을 했던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겹쳐져있을 때 나의 모습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타협을 해왔다. 내가 원한 접시를 사기 위해 예산을 충분히 쓴 나머지 식기를 고려할 여력은 없었다. 내 마음에 드는 의자와 테이블, 소파를 사고 고르느라 가전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이렇게 수많은 타협들은 타협하지 않는 하나의 선택을 위해 애써주고 있었다. 그 타협의 양면 덕에 나는 때로 부족하거나, 아예 없기도 했다. 그래서 자주 불편했으나 괜찮았다. 내게 중요한 하나는 얻었다면.

'이거면 돼. 이것만 있으면 다른 건 부족해도, 없어도 괜찮아. 난 이거 아니면 안 해. 기다릴 수 있어. 내 차례가 오겠지.'

나는 중요한 가치를 정하면 다른 걸로 대체하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의미 한 개를 얻기 위해 내가 놓친 것은 효율적인 삶이다. 내가 추구하는 의미를 얻으려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나는 느리고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원하는 하나의 소파를 사기 위해서도, 내가 마음에 드는 논문을 쓰기 위해서도,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도 남들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더욱이 힘든 것은 내 가치가 타인의 가치와 다를 때 내가 느낀 주눅이었다. 내가 쥐려는 가치는 지극히도 주관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다. 결국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결과는 자주 내 개인적인 뿌듯함으로 그쳐온 적이 적이 많았다. 때로 타인의 인정을 바랐고, 그 덕분에 서운한 마음을 얻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서운함과 뿌듯함 중에 오래 남는 건 뿌듯함이었다.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은 서운함은 강렬해서 눈물바람을 한 날도, 우울이 나를 휘감을 때도 있었지만 며칠 지나면 형체도 없이 휘발되곤 했다. 반면에 뿌듯함은 꽤나 묵직했다. 내가 들인 자잘한 노력과 시간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점점 무게가 상당해진 게 분명하다. 결국 나는 타협하지 않은 대신 내 삶에서 나만 느끼는 만족을 쥐게 되었다. 이 만족과 뿌듯함은 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주고, 내 마음을 다리미로 쫙쫙 펴서 때론 멋진 에지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칫. 그래, 비록 내가 생각하는거라고 해도 잠든 거라고 놀리는 남편도 내가 타협하지 않은 결과이다.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고집스러운 내가 발견한 원석이 맞다. 나는 그의 유머와 다정함, 눈치 있음을 좋아한다. 만나기까지는 좀 오래 걸렸으나 그 덕에 지금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고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주는 상대와 함께 지낸다. 이 선택으로 나는 엄마의 생일선물로 클립을 엮어 목걸이 선물을 해주는 아홉 살을 얻었으니 내가 잃은 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물론 여름이라 클립 목걸이를 하면 쇳독이 오르니 가을에나 니트 위에 할 수 있을 것을 예상해 보니, 역시 내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늘 필요한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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