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을 했다. 몇 년 전부터 무언가 치밀어 오르거나 따분하게 느껴질 때 충동적으로 ‘물들이겠어!’라고 마음먹은 색상을 정확히 머리에 얹었다. 날은 스산하고 옷은 얇은데 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 대신 내 발걸음은 월마트로 향했다. 충동적이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었던 계획이다. 충동적인데 계획에 있었다니, 모순이다. 사람 사는 모양이 다 그렇다. 명확한 인과관계로 답이 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서와 과정이, 심지어 결과까지 예측할 수 없는 모순투성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 전 양귀자 작가의 장편소설 <모순>을 읽어서 더 인상 깊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모순>에는 지지리 궁상맞은 가족이 등장한다. 일찍이 가산을 탕진하고 집을 나간 아버지, 건달질을 일삼으며 조폭 두목을 꿈꾸는 남동생, 어쩔 수 없이 억척스럽고 강인한 집안 가장이 된 엄마. 환경이 말해주듯 예상대로 주인공 안진진도 별 볼일 없는 25살 어른이 됐다. 그러나 안진진은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관찰하는 현실감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 덜 망신당하고 덜 실패하고자 매사에 치열한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명감으로 안진진은 닥쳐오는 모든 선택과 상황들을 분석한다.
첫 번째 분석 대상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이모다. 모든 것이 닮았고 모든 것을 함께하며 자라서 심지어 성적까지 비슷했음에도 결혼을 기점으로 쌍둥이 자매는 운명이 갈린다. 관상이라는 것도 있는데 얼굴이 똑같이 생기면 인생도 똑같진 않더라도 최소한 비슷하게는 살아야 되는 것 아닌가. 여기서 안진진은 행과 불행은 동전 양면처럼 서로 맞닿아 있으며 쉽게 뒤집힐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안진진은 이모를 자신의 엄마라고 소개할 정도로 이모의 삶을 사랑한다. 엄마는 사랑하지만 안쓰러운 존재다. 때때로 인간에게 안쓰러운 감정은 짐이기에 이모를 사랑할 때 안진진은 더 가뿐해 보인다. 꽃으로 장식된 견고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던 이모는 마지막 편지에 ‘모든 불행을 떠안은 것 같아 늘 불안해 보이던 언니의 삶이 부러웠다’고 썼다. 다 가진 여자였음에도 삶이 지리멸렬한 불행이었던 것처럼 누가 봐도 우여곡절 투성이에 즐거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엄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으로 보인 것이다.
두 번째 분석 대상은 안진진에게 다가오는 두 남자다. 한 남자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바르고 계획적인 현실주의자다. 재미는 없어 보이지만 함께 하면 불편함 없이 편안하게 살만하다. 또 다른 남자는 로맨티스트이자 낭만주의자인 사진작가다. 현실은 가난하지만 안진진과 정서적 교감이 크다. 갈등하는 안진진의 모습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 p. 210
사랑은 신호등의 빨간불 같은 모순이다. 이모를 지켜보고도 안진진은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언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실수가 되풀이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소설의 진짜 모순은 그렇게 실패하지 않으려 했던 안진진이 실패를 무릅쓰는 데 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기꺼움을 그에게서 본다.
소설 속 구절처럼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건 틀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번 가보는 마음 아닐까. 물웅덩이를 피하기보단 신발을 다 버리기로 마음먹고 미련 없이 걸어 나갈 때 마음은 더 편한 것처럼.
여러 번 읽고 싶은 소설이 있다. <모순>을 20대에 읽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소설 속 행간의 의미가 30대에 다시 읽으니 보인다. 세월의 힘이 알려준 다른 해석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올가을 또 다시 모순투성이로 얽혀 있는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