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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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의 <긴긴밤>은 지구상의 마지막 하나가 된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아기 펭귄이 함께 떠나는 여정을 담은 동화다. 노든은 동물원에 남겨진 마지막 생존자 중 하나이자 늙고 고독한 존재이다. 코뿔소의 뭉툭하고 두꺼운 앞발로 품어 부화시킨 아기 펭귄은 코뿔소에게 의지하며 자라난다.


서로 다른 시작과 끝에 서 있는 두 존재는 동물원을 떠나 함께 긴 여행을 시작한다. 밀렵꾼들에게 아내와 아이를 잃고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게 삶의 전부였던 노든은 아기펭귄을 바다에 안전하게 데려다 주기 위해 복수도 미룬다.


여정은 순탄하지 않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계속 따라온다. 그러나 두 존재는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펭귄은 어린 호기심과 생기를, 코뿔소는 삶의 지혜와 따뜻한 품을 내어준다. 그 길 위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와 침묵 속에는 살아가는 이유와 떠나는 법에 대한 사색이 스며 있다.


그 과정에서 둘은 깨닫는다. 복수는 필요 없음을. 그리고 아무리 외롭고 힘들더라도 곁에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면 힘이 난다는 사실을. 코뿔소 역시 부모 없이 코끼리 무리에서 자라났고, 펭귄은 버려진 알에서 태어났다. 사랑하는 이들의 몫까지 살아 내야 하는 노든과 스스로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 내는 어린 펭귄은 나이와 생김새, 체질까지 모든 것이 다르지만 같은 목표를 갖고 '우리'가 되어 파란 지평선으로 나아간다.


바다에 거의 다다를 무렵 밀렵꾼들을 만난 코뿔소는 아기 펭귄을 지키기 위해 대신 상처를 입는다. 더 이상 노든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아기 펭귄은 용기를 내서 혼자 떠난다. 마침내 다다른 바다에서 벅차오르는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노든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가슴 아팠지만 서로에게 남긴 따뜻한 기억 덕분에 긴긴 밤을 건널 수 있었다.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 p.99


아기 펭귄이 굴러 떨어지고 힘이 빠져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절벽을 오르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다. 종을 넘어선 그들의 우정과 용기, 협동이 존경스럽다. 함께 있을 때 행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로 살아가기' 위해 기꺼이 고통과 두려움을 마주한다. 안락한 현실을 뚫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과 나약한 내가 자꾸 비교돼 부끄럽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야생으로, 야생에서 동물원으로, 동물원에서 다시 길 위로. 반복되는 비극 앞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나간 흰코뿔소 노든은 감동과 기적 그 자체다. 동시에 내가 살면서 견뎌야 할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용기를 주었다. 내 곁에는 가족과 친구, 이웃이 있다. 노든 곁에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빗방울을 맞고, 서로의 입김으로 긴긴밤을 녹여준 친구들이 있듯이. 저렇게 기구하게 살아낸 노든도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있겠나 싶은 막연한 배짱도 생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가을의 풍경이 겹쳐진다. 나무에서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바람이 서늘해질수록 우리는 덧없음과 외로움을 더 가까이 느낀다. <긴긴밤> 속 여정은 바로 그 계절의 마음을 닮았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품은 시간이다. 낙엽이 흙이 되어 나무를 다시 살리듯, 노든 할아버지의 이별과 아기 펭귄의 성장은 서로 연결돼있다. 스러지는 나뭇잎 앞에서 소멸과 고독을 마주하지만 그 한가운데서도 누군가 곁에 있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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