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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대문 Jun 12. 2023

(바라건데) 나의 마지막 비자 일지 -1

다섯번의 거주허가증, 그리고..


이 차가운 남의 나라가 얼추 내 나라가 되기까지, 청춘을 갈아넣고, 눈물도 좀 흩뿌리고 그랬다.

그랬더니 이제는 기어코 마지막 비자를 받는 순간에 도달했다. 왜 마지막이냐하면, 다음 갱신때는 영주권을 신청할거고! (제발 거절당하지 않길..) 자격도 되었고, 직원도 영주권을 권했기 때문이지. 영원히 살 생각이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인생은 모르지만 그래도 뿌리는 조금 내려보게요.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자 연장할 때 마다 드는 돈이 아깝고, 극악의 비켓팅(18. 새벽 세시, 비자를 받으러 나갔다) ​이힘들고, 서류 준비하는 것도 시간과 폼이 꽤 들어서요. 라는 대답은 속으로만 하기로 하고.




머리에 꽃밭만 가득한 채로 도달했던 곳에서 나는 내가 세계를 재패하는 꿈을 꿨었다. 왠지 유럽에서 살면 내가 막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그랬던거지 뭐.


반짝반짝한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예를들면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앉는 삶. 근데 살다보니 어릴적 소름끼치게도 싫어했던 평범한 인생이라는게 사실 정말 어려운 거더라.

이미 해외살기를 결심한 순간부터 평범함의 궤도에서 떨어져나왔다는 것은 인지했지만, 그래도 삶의 시간까지도 이렇게 어긋날줄이야.


누구는 결혼을 하고, 누구는 직급이 올랐고, 누구는 집을 샀고. 이런 소식들이 바람결에 들려오는데 나는 비자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처지가 한심해서 준비하던 서류를 다 내팽겨치고싶은 마음도 울컥 올랐었다.


어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아악- ’하면서 책상 쓸어버리기! 이런거 해보고 싶었는데. 현실은 드라마가 아닌지라 그렇게 흩뿌리고 중요한 서류가 없어졌다며 일주일 내내 집을 뒤엎을것도 나여서 관두기로 했다.


사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번에는 비자 연장을 준비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음 그러니까, 마음을 더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독일에서 비자청에 간 횟수만 벌써 다섯번. 그 중에 몇번은 마음을 벌벌 떨었고, 몇번은 손을 벌벌떨었고, 몇번은 눈물도 흩뿌렸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가막히고 코가막혀서.

뭐가 아쉽다고, 이 나라에서 내가 꽤나 괜찮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서 겨우겨우 거주허가증을 받아내야하나 하는 회의감도 들었던 모양이다. 간신히 살아내는 중인게 피부로 와 닿아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그냥 그려러니 싶었다. 매일매일 나를 증명하고, 나를 권하는 삶을 살다보니, 심사를 좀 받을 수도 있지. 싶었다.


내가 멀쩡하게 일하고 멀쩡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되는 건데 예전에는 뭐가 그렇게 억울했을까, 하는 어른스런 생각도 좀 했다. 이전에는 필요할까 싶어서 한 뭉텅이씩 들고가던 서류들도 이제는 꽤나 얇아졌다. 결국 외국인청에서 연장하는 비자는 ‘니가 돈을 좀 버냐’는 걸 보는 거라, 그것만 잘 증명하면 되는 것이라서. 그걸 알기까지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녔었지만, 여튼 이번엔 좀 그랬다.


하지만 (바라건데)내 마지막 비자가 될 이번도 극악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비케팅은 여전했다. 혼자사는 인생이 아니라더니, 비자를 받을 때마다 손을 내밀어주는 친구가 하나씩 있다는 것도 놀라울 노릇이다.


내 좁고 깊은 인관관계에도 이런 봄비같은 순간이 있다니. 여튼 이번에도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성공했다. 내가 비자가 이주일 남았는데 아직도 예약이 없어서 아주 심란해. 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팔 걷어붙이고 함께 비자청 홈페이지를 박살내 주었다.


아침이고 밤이고 들어가보다가 밤 열두시가 되었을 무렵 요란하게 전화를 해댔다. 지금 자리났으니까 되는 날짜를 말하라면서.


여러분. 비자예약을 하고 싶어요? 그럼 친구를 잘 사귀세요. 엄.내가 포기했을때 포기하지 않는 친구요. 그게 비자청 홈페이지를 부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나를 증명하는 자료를 그러모으고 내 거주 허가증을 연장하기 위한 돈을 통장에 채워넣고 보정이라고는 하나도 안 한 증명사진을 달랑달랑 들고 약속된 시간에 비자청으로 가기.


가는길에 제발 이상하지 않은 직원 만나게 기도하기.

쪼금 간절하게 기도하기.

이게 제일 중요하다. 별 다섯개, 밑줄 쫙.


사실 심드렁망드렁 하게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비자 받는 날 아침부터 머리에 땀나게 기도하면서 비자 받으러 갔다. 하하. 앞에서 쿨한 척 이야기 한거 다 들켰네.


심사받는다는 사실까지야 그려러니 싶었지만 가끔가다있는 이상한 정의감, 혹은 융통성 없기! 라는 직원을 만나면 내가 독일에 착상하기 전 시절 이야기부터 다 긁어모아 인생사를 읊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도 잘 모르면서 ‘법이그래!’라고 배째라 하는 인간들도 있기 마련이라서 그렇다.


이 나라에 머물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넘겼다지만, ‘니 인생 방해해 볼게’ 라는 마음가짐으로 달려드는 사람을 수용할 마음은 없어서. 그런 기도는 좀 했다.

간절하게.

멀쩡한 직원 만나게 해주세요.

이왕이면, 마음도 좀 넓은 사람으로요. 제 노력을 노력으로 봐 주는 사람을요. 그 뒤로 바라는 점 오백개가 더 있었다는 건 비밀이다.


그리고 혹시 독일에서 인생을 영위하기 위해 비자를 받는 분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당신의 예약시간보다 적어도 20분은 일찍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그러면 그들도 인간이라서 빠르게 일처리 하고싶은 마음이 드는가봐요. 이럴때는 또 세상 열심이지.  


내 지인은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도착했는데 그 뒤로도 30분을 기다려도 자신의 예약번호가 뜨지 않아서 기다리다 못해 경비원을 붙들고 물어봤더니, ’니 순서는 이미 지나갔어, 다른 날 예약을 잡아‘라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도시괴담같죠? 아뇨. 블가능한 모든 것이 가능한 비차청. 내가 예약시간을 맞춰왔고 이렇쿵 저렇쿵 해봐야 심기를 거스르면 곤란해지는 것은 심사받는 사람이라, 거기에 가득한 ’을‘들은 그러면그냥 흑흑 울면서 집에 가야합니다.  


그런 괴담을 발판삼아 한시간을 일찍 도착한 거대한 비자청 앞. 삼삼오오 모여있는 경비원에게 다가가 내 예약 서류를 보여주었다.

’오케이 들어가. 건물은 저기야‘ 하는 안내는 받았다.


하. 시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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