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에 한식을 챙겨가는 아빠를 이해하게 될 줄이야

모로코에서 생긴 일 2

by 앨리스

나는 외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다.


새로운 음식을 아주 가리지는 않지만, 일주일 정도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굳이 한식을 찾아 먹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지 음식을 즐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우리 아빠는 아니다. 어딜 가든, 아빠의 캐리어의 절반은 한식으로 가득 차있다. 주로 라면이 그 자리를 메우고, 그 외에도 작게 포장된 김치나 진미채, 김 같은 밑반찬도 빠뜨리지 않고 챙기신다.


여행지에서 아빠의 아침식사는 항상 한식이었다.

이틀에 한 번은,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도 야식으로 라면을 드셨다. 항상 '속이 니글거려서 못 참겠다'라고 하며 렌지에 물을 올렸다.


머리로는 아빠가 이해 갔지만, 온전한 이해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오십년이 넘게 살아오신 분이시니 당연히 외국 음식(특히 유럽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시겠거니 하다가도 그래도 고작 일주일 유럽 여행인데 그 여행의 절반 이상을 한국 음식으로 채우는 아빠가 이해가지 않았다. 굳이 맛있는 파스타나 피자를 두고 왜 맨날 드시던 라면을 또 드시는 걸까. 아빠가 제대로 유럽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여행 경비가 아깝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올해 초, 나는 모로코로 여행을 갔다. 음식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인 입맛에 모로코 음식이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기대가 되었다.


나의 첫 식사는 모로코 코스요리. 만원대로 저렴한 가격에 모로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에 갔다.


이름 모를 노란 죽부터 모로코의 대표 전통 음식 중 하나인 타진과 쿠스쿠스까지. 나에겐 익숙하면서도 낯선 맛이었다. 노란 죽은 묘하게 옥수수 죽 같았고 타진은 한국식 찜 요리에 토마토소스를 넣은 듯한 맛이었다. 첫 입에만 좀 망설였지 그 후에는 맛있게 잘 먹었다. 모로코 음식이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는다더니 정말 그랬다.


여행 이튿날,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사하라 투어 버스에 올라탔다. 투어는 총 2박 3일로, 코스는 꼬박 하루 반 동안 사하라로 향하며 가는 길목의 작은 마을들을 둘러본 후, 이튿날 저녁에 사하라를 도착하는 코스였다.


투어버스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투어 버스를 내리면 데이터가 먹통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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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았다. 조금 차멀미가 나긴 했지만 한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곳의 시골을 언제 내가 또 와볼까 싶은 마음에 들뜬 마음이었다.


점심즈음이 되자 버스는 한 시골 마을의 작은 상가지역에 멈춰 섰다. 그곳엔 레스토랑과 숙소 건물 몇 채만 덩그러니 있었다. 주차된 차들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오로지 투어버스 손님들 덕분에 운영되는 듯했다.


버스 안에서 친해진 몇몇 사람들과 나는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규모가 큰,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다른 모로코 음식점과 달리 아주 작은 음식점이었다.


그 식당의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다. 셰프이자 종업원인 한 남자가 나와 우리를 반겼다. 그는 우리를 위해 야외 테이블을 차려주며 메뉴판을 나눠줬다.


메뉴판에는 여러 메뉴가 있었다. 아니, 있는 줄 알았다. 읽어보니 그 메뉴들은 모두 타진 혹은 쿠스쿠스였다. 그저 들어가는 재료가 닭이냐 양이냐 소고기냐의 차이였다.


나는 그렇게 또 타진을 먹었다. 조금 다른 것을 먹어보고자 이번엔 다진 고기가 아닌 닭고기 타진을 골랐다. 타진 위에는 감자튀김이 올라가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타진을 나는 역시 남김없이 맛있게 해치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투어버스는 허름한 호텔에 도착했다. 가이드의 말에 따라 나는 방에 짐을 푼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큰 원형 테이블이 여러 개 있었다. 나는 같은 투어버스를 타고 온 일행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투어 가이드는 코스요리로 식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코스의 시작은 이름 모를 노란 죽이었다. 내가 첫날 저녁에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었지만, 그 레스토랑보다는 맛이 별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코스. 타진과 쿠스쿠스였다. 열명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눠먹을 수 있도록 두 음식 다 여태까지는 본 적 없는 크기의 그릇에 담겨 나왔다.


그쯤 되니 타진이 약간 질리기 시작했다. 그저 음식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물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준비된 요리는 그게 전부였다. 깡시골이라 밖에 나가서 다른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깨작대며 둘째 날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셋째 날. 나를 태운 투어버스는 새벽같이 출발했다. 아침 식사도 스킵한 채였다.


점심즈음이 되자 한 식당 앞에 버스가 멈췄다. 가이드는 뷔페요리를 준비했다고 했다. 드디어 좀 다른 걸 먹어보는 건가? 하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 가니 정말 뷔페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큰 은색 음식 통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도 부실하게 먹었던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음식 앞으로 향했다.


이럴 수가. 또 타진이었다. 음식이 흔히 뷔페에서 보던 은색 통에 담겨있어 설마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냄새를 맡아보니 타진이 맞았다. 보통 타진 요리는 전용 토기 냄비인 '타진'에 담겨 나오는데 이곳은 뷔페식으로 타진 요리를 은색 용기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담긴 그릇만 좀 다를 뿐, 똑같은 타진이었다. 다른 요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진이 아니면 쿠스쿠스, 그리고 정체 모를 수프, 그것도 아니면 항상 음식과 함께 나오던 모로코 전통 빵인 홉즈가 담겨있었다.


뭔가 새로운 요리를 먹을 거라는 기대를 해서일까, 음식이 더욱 물리게 느껴졌다. 고기 한 두 조각, 빵 반 개를 먹고 나니 물려서 더는 입에 안 들어갔다. 그나마 옆에 있던 귤 몇 개를 까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고작 투어 이튿날 점심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저녁도, 그다음 날 아침도, 그리고 그날 점심도 나는 똑같은 모로코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분명 타진마다 다른 점들이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고기 종류만 바꾼 똑같은 타진이었다. 뭘 먹어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투어를 갔다 온 다음날, 나는 검색창에 '마라케시 한국식당'을 검색했다. 도저히 모로코 음식은 못 먹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주요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양념치킨과 김밥을 시켰다. 종업원은 'Both?(둘다?)'라고 말하며 눈을 크게 떴다.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라는 걸 알았지만 상관 없었다.


음식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김밥에서는 참기름이 아닌 식초맛이 났고 양념치킨은 눅눅했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모로코 음식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했다


그 후로 남은 여행 이틀 동안 나는 모로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숙소에서 제공해 주던 무료 아침식사도 거부한 채 빵이나 과자로 이틀을 버텼다.


그렇게 모로코 여행을 마치며 나는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왜 아빠가 유럽여행을 가서도 한식을 찾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에게 모로코 음식이 낯설었듯, 아빠도 나에겐 익숙한 양식이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맛있고 입맛에 맞는 양식을 먹었다한들, 며칠만 지나도 다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고 금세 물리셨을 터였다. 나에게 타진이 닭고기든 다진고기든 뭐든 상관 없이 그냥 타진이었던 것 처럼, 아빠에게는 까르보나라든 라자냐든 라비올리든 다 똑같은 파스타였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모로코 음식을 먹으라 하면 꽤나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다. 쿠스쿠스와 타진 외에 다른 모로코 음식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분명 모로코 음식은 맛있었으니까. 다만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그렇게 며칠 내내 몰아 먹기에 버거웠을 뿐이다.


다음에 아빠와 또 유럽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땐 한식만 먹는 아빠에게 투덜대기보단 몰래 내 캐리어에도 한식을 몇 개 챙겨가야지 싶다. 어쩌면 한국 음식을 충분히 드실 수 있게 하는 게 아빠가 유럽 음식도 여행도 더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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