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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 최진영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by 세잇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이라는 소설을 만난 건 2023년의 늦은 가을로 기억합니다. 단 한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수명중개인'으로서의 삶을 인지하게 된 목화. 할머니 임천자는 이 능력을 기적으로 믿었고 엄마 장미수는 저주로 여겼지만, 목화는 거부할 수 없는 세습된 이 운명을 감내하고 받아들이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해 갑니다.


수많은 죽음 속에 살아진 단 한 명의 삶 앞에, 한 인간에게 선택과 구원을 내몬 신은 무심했고, 이 역할과 능력을 부여한 나무는 말이 없습니다. 수명중개인으로서 한 사람을 살리고서는, 어지러움과 구역질로 괴로워하는 목화가 내뱉은 저 문장 앞에 저는 오래도록 멈춰 서있었습니다.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오래된 이별을 떠올립니다. 그때는 분명 사랑이었는데, 사랑이라 믿었는데. 마주하고 있어도 보고 싶었고, 만날 나날이 기다려졌고, 빈틈없이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뾰로통했던 순간들의 감정이 이별 후에야 내가 만든 이기심이며 외로움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겠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사랑을 원했던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던 것뿐인지. 내가 했던 사랑이 목적 없이 그저 사랑이면 되겠구나 믿고 싶었던 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버지의 오토바이 뒷자리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동생과 집에서 놀다 찬장의 유리가 손등에 박혀 펑펑 울던 10살의 남자아이는, 아프고 놀라 울면서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그 뒷자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아버지의 등자락이 그렇게 부끄러웠습니다. 남루한 가정사정에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아 어른스럽다던 칭찬을 달고 살던 그 아이는 어느새 자라 아빠가 되었고, 열이 오른 딸을 업어 차에 앉히며 그 시절의 오토바이 뒷자리를 떠올렸습니다. 아이에게 끝없이 주고 싶은 지금의 마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제는 압니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사랑은 질문이라 믿습니다. 궁금해하고, 관심을 갖고, 그로 인해 지금은 어디에 있을지, 무얼 하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할지, 무엇을 걱정할지 자꾸 알고 싶어지는 마음 말이죠. 그런데 질문하지 못하는 사랑은 너무 멀리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표현하지 못한 마음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며, 밖으로 꺼내지 못한 고백, 전하지 못한 진심은 안타깝게도 그대로 마음속에 쌓여갑니다. 말하지 못한 사랑은 변질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과의 물리적인 거리는 좁힐 수 있을지언정,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져만 갑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완성되지도, 정리되지도 않은 채 그렇게 부유합니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아침마다 어머니는 ‘자네 밥은 먹었는가 ‘, ’ 퇴근은 제때 하는가 ‘, ’ 시국이 어지러우니 술자리도 조심하고 매사에 말도 조심하시게 ‘ 라며 안부를 건네십니다. 바쁨의 핑계로, 멀지 않은데 사신다는 안도로, 매일이 반복되는 지겨움으로 인해 짧은 이모티콘 하나로 그 문장들을 밀어두다 이내 알아챘습니다. 별일 없이 무탈하게 아들의 하루가 채워지길, 하루의 무게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무겁기를, 자주 보진 못하지만 제 삶의 가장자리를 지켜주겠다는 마음이시란 걸 말이죠. 선언적인 시작 없는 이 사랑을, 최진영 작가가 알아채고 제게 문장으로 전해주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 마음의 헛헛함으로 인해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워서 알아채지 못한 건 아닐는지요. 끝난 뒤에야, 지나간 뒤에야, 오래도록 아프고 난 뒤에야 사랑이었다고, 사랑이 아니었다고 겨우 이름을 붙이는 건 아닐는지요.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놓쳐버린 줄 알았던 후회에도

다 흘려보냈다 믿었던 허탈함에도

온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요.


너무 멀거나 가까워 알아채지 못했을 뿐

사랑은 언제나 먼저 와 있고

우리는 그걸 오래 지나서야

하나의 문장, 하나의 추억으로

되돌아보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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