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히 숨어있던 벌레와의 만남

(주의)불쾌함 없이 단순히 벌레를 맞닥뜨린 상황에 대한 텍스트만 즐비해요

by 이솔

*주의

자취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바퀴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다행히 불쾌한 묘사나 사진은 없고, 벌레를 맞닥뜨린 상황에 대한 텍스트만 즐비합니다. 싫으시다면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EP bonus}


바퀴친구

인생의 절반 이상을 아파트에서 살며 집에서 벌레라곤 개미나 초파리 밖에 구경해보지 못했던 나는, 자취 시작 정확히 한 달 만에 난생처음 바퀴벌레(이하 바퀴친구)를 만났다. 물론 어느 습한 태국의 도로라던가 종로 3가 노포 식당에서 빠르게 쏘다니는 바퀴친구를 본 적은 있으나, 내가 사는 공간 ‘안'에서 이 친구를 만난 것은 자취를 시작하고서가 처음이었다. 음식물을 처리할 일이 많은 식당과 가까이 있는 건물엔 벌레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그러니 시장 바닥 위에 있는 나의 자취방에 벌레가 즐비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퀴친구의 주 출몰 지역이 부엌이라는 점이다. 나의 자취방은 부엌과 안방이 문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가끔 퇴근 후 에너지가 고갈되어 잡을 힘도 없을 때 바퀴 친구를 만나면, 눈 딱 감고 안방 문만 닫아버린다. 그러면 적어도 내가 쉬는 공간까지 침투하진 못한다. 주변에 매우 비싼 월세를 내가며 강남에서 자취하는 친구로부터 베개에서 바퀴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에게 적어도 침대는 청정구역이다. 아늑해야 할 침실에서 바퀴친구를 맞닥뜨린 상황보다는, 부엌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지금이 낫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묵묵히 투정하지 않고 바퀴친구를 잡고 있다. 월세 대비 바퀴친구의 위치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안방 문을 닫아버리고 바퀴친구를 회피할 때도 종종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경우 부엌 세간살이를 뽈뽈뽈 돌아다닐 바퀴친구를 생각하면서 에프킬라를 쥐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주방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가 각종 부엌 집기들이 모여있는 싱크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을 때 스프레이를 조준한다. 스프레이를 맞자마자 난리부르스를 피우기 때문에 잘 조준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프레이를 5분 정도 뿌리면 바닥에 톡 떨어져 마치 스파이더맨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 같은 비주얼의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럼 휴지를 다섯 바퀴 정도 둘둘 말아 휴지통에 버리거나, 종이컵으로 덮어두고 카를로에게 처리를 부탁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친구이니 가끔은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이소에서 산 5천 원짜리 잠자리채로 쓱 낚아채 바닥에 처박은 뒤 스프레이 범벅을 하는 것이다.


나는 바퀴친구가 그렇게 소리를 내는 존재임을 알지 못했다. 그의 소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상투적이지만) '샤샤샥' 그 자체이다. 대체 몸의 어떤 메커니즘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그 끔찍한 소리가 나는지 궁금하지만 알고 싶진 않다. 그저 누군가가 이동하는 소리일 뿐인데, 마치 공포영화 BGM처럼 본능적으로 온몸에 소름 쫙 끼친다.


운이 나쁘면 자취방 건물 벽에서도 바퀴친구를 만날 수 있다. 언젠가는 건물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내 머리 위로 떨어진 적도 있다. 아마 현관문 위쪽에 붙어있다가 문이 열리는 충격에 툭하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정수리에 닿았던 그 다리의 촉감이 아직 생생하다. 아마 그 친구도 당황한 나머지 머리카락을 열심히 밟으며 빠져나갈 방법을 갈구했겠지… 이 기억은 아직까지 트라우마가 되어 현관문을 열 때 흠칫 거리는 게 습관이다.


그리고 리스펙트

어느 날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는데 문 밑에 놔둔 나무 발판 아래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나의 시력은 0.3으로 매우 나쁜 편인데, 뭐랄까 더듬이 같은 게 발판 위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나무 발판 밑에는 하수구가 있었는데, 배수관을 타고 바퀴친구가 올라온 것으로 보였다.


배수관을 역행하여 힘들게 우리 집 화장실 하수구에 당도한 바퀴친구는 지금 더듬이를 조심스레 흔들며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발판 아래 교묘히 숨어있는 그 행색이 불쌍해 보여 잠시 살려줄까 생각했다. 더듬이를 흔들며 쉬이 몸을 보이지 않는 바퀴친구가 안쓰러웠다. 내 집 하나 없는 서울에서 남의 집에 얹혀사는 내 처지랑 뭐가 다를까.


가끔 극단적 허무주의가 나를 뒤덮을 때면, 법이라든지 제도라든지 하는 것들이 무의미해져, 이 땅을 누구의 것이라고 정의한 사회적 약속 자체에 반기를 들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내가 벌레집에 세 들어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벌레 입장에선 느닷없이 나타난 침입자가 정체 모를 액체를 뿌려 자신을 죽이려 하니 어이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을 해치는 것도 아닌, 그저 하루 더 살아가는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벌레의 삶에 어느 정도 리스펙트를 취하기로 했다. 어마어마한 번식력을 가져 한두 마리 죽인다고 박멸될 것도 아니니, 직접적인 피해를 받을 만큼 가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망칠 기회를 주기로. 최소한 나의 안방까지 침범하진 않으니까.


IMG_3932.jpg 이번 화는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서 본문과 무관한 귀여운 고양이 사진으로 독자분들을 유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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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저 성수동에서 자취해요

{EP2} 구집자,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자

{EP3} 가계약금 반환 사건

{EP4} 25만 원짜리 월세방의 비밀

{EP5} 집 밖 화장실이 괜찮았던 이유


{EP6} 나의 밥을 뺏어 먹는 남자

{EP7} 꽤나 실용적인 죽음의 쓸모

{EP8} 엄마가 요즘 들어 부쩍 많이 하는 말

{EP9} 싸구려 월세방이 내게 준 교훈

{EP10} 집을 꾸미고 살아야 하는 이유


{EP11} 서울 상경, 그 저평가된 행위에 대하여.



ps.

날것이 모여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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