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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로 심리치료하기

심리상담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늘 한 부분이 비어 있다.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으며, 어떤 구멍은 끝내 메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은 결코 허무가 아니라 응시해야만 하는 무의식의 심연이다. 하루키의 인물들은 대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불현듯 균열을 경험한다. 누군가가 떠나거나, 꿈속에서 길을 잃거나, 혹은 아주 사소한 어떤 반복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마주친다. 치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삶이 문득 낯설어졌을 때. 이유 없이 허전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낄 때. 하루키의 소설은 그러한 정서적 풍경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면서 독자에게 말한다. “괜찮아, 너만 그런 게 아니야.”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 도쿄를 떠나고, 지하 세계로 내려가고, 이면의 세계로 침잠한다. 그 여정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자아탐구라기보다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표면 아래에 깔린 무의식의 구조를 탐색하는 드라이브다. 상담에서도 내담자와의 대화는 대개 이런 식으로 흐른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에서 시작해,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루키의 세계에선 정확한 원인이나 명료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우리가 두려워하던 감정, 숨기려던 기억, 혹은 자꾸만 밀어내던 욕망들이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된다. 그것은 곧 내 안의 낯선 나를 만나는 과정이다.


하루키는 음악을 자주 언급한다. 재즈, 클래식, 록, 그리고 조용한 피아노 선율들. 음악은 그의 세계에서 감정의 번역기처럼 작용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음악으로는 가능하다. 상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감정은 언어로 옮기는 순간 왜곡되거나 말라버린다. 우리는 “슬펐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감정의 생생함을 손에서 놓는다. 그래서 상담가는 질문해야 한다. “어떤 느낌이었나요?”, “그때 들렸던 소리는?”, “마치 어떤 음악 같았나요?” 하루키식 심리상담은 언어의 여백을 견디는 힘에서 시작된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 하루키의 인물들이 끝없이 걷고, 조용히 요리를 하고, 고양이를 기다리는 것도 결국은 말해지지 않는 감정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상담은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나 함께 있어주는 시간에서 가장 깊어진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하루키의 집착은 곧 상실의 심리학이다. 그는 상실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상실을 둘러싼 침묵을 탐구한다. “왜 떠났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라는 회상, “그 사람은 그냥 사라졌어요.”라는 묘사. 이 말들은 곧 상실을 외면하는 동시에 끝내 그것과 마주하게 만드는 장치다. 내담자 중 많은 이들이 상실을 말할 수 없기에 아프다. 떠나간 사람보다 떠난 뒤 아무 일 없던 듯 흘러가는 시간이 더 무섭다. 하루키는 그 시간 속에서 머문다. 그는 인물들에게 그 상실을 견디게 하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리듬을 찾게 한다. “이유 없이 아픈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아픔을 설명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함께 고요히 지켜보는 누군가다. 하루키의 소설은 그 지켜보는 자의 자리에 독자를 앉힌다. 상담가는 마찬가지로, 내담자의 말하지 못한 슬픔을 침묵 속에서도 들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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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의 세계에는 초현실이 흔하게 등장한다. 두 개의 달, 비현실적인 여자, 꿈속의 우물, 혹은 기억의 공간 같은 것들. 이 모든 상징은 사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의 현실성’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감정을, 꿈과 상징을 통해 경험하고 처리한다. 그래서 상담가는 내담자의 상징을 놓쳐선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말, 이상한 환상, 어릴 적의 공포, 혹은 반복해서 떠오르는 장면들. 하루키식 심리상담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가 진짜일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해, 그 세계에서의 자아를 만나게 하는 것. 현실을 벗어나야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진실로 가는 우회로다. 그리고 그 우회는 때로 가장 깊은 치유로 이어진다.


하루키의 인물들은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려 하지만 그 이해가 끝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관계 속에서조차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다. 심리상담에서도 마찬가지다. 내담자와 상담가는 어떤 근본적인 거리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거리를 무리하게 없애려 들면 진정한 만남은 불가능하다. 하루키는 그 거리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방식, 다시 말해 타인의 신비를 존중하는 태도를 이야기한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라는 문장 하나가 얼마나 많은 감정과 인정, 포기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지. 우리는 끝내 타인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타인을 진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을 얻게 된다. 상담은 바로 이 여백에서 진실로 깊어진다.


하루키의 철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에 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설명도 되지 않았으며, 사랑은 돌아오지 않고, 꿈은 끝이 났지만 인물들은 또다시 커피를 내리고, 파스타를 삶고, 거리를 걷는다. 그 일상의 반복은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상처를 끌어안고서도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의지다. 상담은 마법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하지만 상담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그 사소한 결정을 지지해줄 수 있다. 하루키의 문장처럼 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건 결코 아무 일도 아닌 일이었다.” 우리는 내담자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작고도 큰 기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와 함께 지켜보는 동행자가 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담실이다. 조용하고, 약간은 먼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이야기. 그 안에선 누구도 급하게 다그치지 않고 누구도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아주 느리게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가장 깊은 층위에서 이뤄진다. 내담자가 끝내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괜찮아진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 그것이야말로 하루키적 치유가 도달한 순간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의 심리상담 속에서 찾아야 할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어쩌면 한 권의 책 속에서, 하루키의 어느 문장 속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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