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시와 사상』가을호
1.
한 눈 감고 한 눈 뜨고 잠든 고양이가 있었다
동백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있었다
‘눈이 쌓이고 쌓여. 아무도 이곳이 어딘지를 몰라‘*
읽고 또 읽은 눈雪으로 이루어진 나는
어제의 눈발이 되어 걷고 걷는 중이야
너로부터 잊혀져가는 너의 목소리와
낱말들의 무표정으로
어떤 모퉁이의 어떤 정원을 헤매며
나의 책은 내가 써야 한다**
2.
그 모든 겨울이 지나간 뒤에
홀로 남겨진 겨울처럼
가마우지는 우는 중이다. 비는 옮겨가는 중이다. 마지막 기차는 떠나가는 중이다.
3.
빈 의자의 속도로, 너의 창 앞을 머뭇거리던 나뭇잎의 속도로,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쓰는 나는
픽션의 너야
논픽션의 심장이야
나무에 나무를 더해갈 뿐
숲을 보려 한 것은 아니었지
그러나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보이지 않아
지나간 나무를
불러본 적 없는 이름으로
불러 볼 때
더 이상 정지할 수 없는 밤이 있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빈 의자가 있다
한 눈 뜨고 한 눈 감고 잠든 고양이가 있다
* 최정례 「너의 여행기를 왜 내가 쓰나」 中
** 김응수 영화 「사각형을 위한 씻김굿」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