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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습관 들이는 중

by 코니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휴대폰을 집어 든다. 아이들에게 알릴 긴요한 사항이 있다. 아마 모두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무 생각도 않고 있을 테다. 나라도 알려줘야 한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큰애는 지금쯤 이미 일어나 있을 테지만 아무 때나 휴대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둘째는 아직 침대와 한 몸일 게 분명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 하루 중 언제 가는 엄마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할 테니 나는 그저 내 의무에 충실할 따름이다.

'오늘 아빠 생일이니깐 축하 메시지 하나 꼭 보내줘'



둘째가 고 3이던 작년까지만 해도 큰애만 신경 쓰면 됐었다. 하지만 올해부턴 기숙사에 있는 둘째 딸아이에게도 알리미 역할을 해야 한다. 사실 한 지붕 아래 모두 모여 살 적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하다못해 미역국에 팥이 들어간 찰밥을 먹다 보면 오늘이 누군가의 생일임을 절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전에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가족 생일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든 듣게 된다.

"다음 주 생일에 뭐 해줄까? 먹고 싶은 거 말해봐. 케이크는 무슨 케이크로 만들지? 딸기? 아님 초코?"

가족들 생일을 단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는 나이기에 함께 한 밥상에서 이런 얘기가 오가게 되면 서로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게 된다. 사실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땐 우리 부부의 생일 날도 제법 흐뭇한 풍경을 그려냈다.



하지만 집을 떠나 자신만의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되면 아이들은 본인 챙기기에 급급해진다. 아무런 간섭 없이 그동안 꿈꾸던 혼자만의 삶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가족은 등한시되기 마련이다. 가족애가 유별나면 좀 다르긴 하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은 그 정도까진 아니다. 내가 일일이 귀띔을 해줘야 한다. 그것도 너무 빨리 알려주면 막상 당일에 까마득히 잊어버려 타이밍을 잘 맞춰 얘기해줘야 한다. 아직은 모두 설익은 과일들이라 지금 그들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건 욕심일 뿐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땐 달라질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머리로는 이렇게 다 이해되지만 마음 한쪽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아쉬움과 서운함은 또 어쩔 수 없다. 지들이 먼저 알아서 축하 인사 정도는 해주면 오죽 좋을까 싶다. 허나 그러지 못하니 이렇게 엎드려 절 받기라도 하는 수밖에.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인사나 선물을 받으려는 건 결코 아니다. 단지 그냥 가족이니깐. 진심이든 형식적이든 가족 간에 생일 축하 인사정도는 하고 살아야 한다. 습관이 안되면 나중엔 더 하기 어려워진다. 지금은 습관을 들이는 중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습관이 모여 결국 끈끈한 정이 된다.



그런데 좀 얄미운 게 요 놈들이 본인들 생일은 또 찰떡같이 챙긴다. 사실 둘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좀 더 지켜봐야 하고 딱 꼬집어 큰애를 말하는 게다. 자취를 하던 대학생 시절 평상시엔 잘 오지도 않더니 생일만 되면 어김없이 집에 나타났다. 한 번쯤 빼먹어도 되건만 어찌 그리 부지런히 오던지. 심지어 군입대 후에도 생일에 맞춰 휴가를 나왔다. 물론 어린이날에 태어났기에 그 언저리부터 대체 휴일이니 연휴니 해서 빨간 날이 좀 많은 것도 이유가 되긴 했다. 하지만 아이는 당당히 말한다.

"내 생일이니깐 좀 누리고 즐겨야지"



그래도 내 생일엔 아이들 나름 노력을 하는 편이다. 둘째야 지엄마라면 아직까진 끔찍이 여겨 뭐든 해주려 한다. 큰애도 알아서 전화 정도는 한다. 다가오는 내 생일은 둘째 없이 처음 맞이 하는 거라 꽤 쓸쓸할 것 같다 했더니 휴가 나온 큰애가 큰소리친다.

"그땐 내가 있잖아. 제대하고 옆에 있으니 내가 축하해 줄게"

지가 한 소리지만 아마 본인은 까마득히 잊고 있을 테다.



그에 반해 남편 생일엔 아이들이 다소 무심하다.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그의 잘못도 없지 않다. 어쩜 제일 클지도 모른다. 남편은 공감이란 걸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남의 마음은 고사하고 자식들 마음이 어떤지 뭘 원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행동해 왔다. 서로 마음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남편은 잘 모른다. 아이들이 어릴 땐 그래도 아빠니깐 서운함이 있어도 그냥 시키는 대로 따랐지만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는 더 이상 아니다.



게다가 지금껏 아이들 생일이면 항상 내가 차려놓은 밥상에 슬그머니 숟가락만 얹으려 한다. 선물을 포장하고 있음 괜히 옆에 와서 포장을 돕거나 장식용 풍선에 바람을 넣어주는 식이다. 따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나 별도의 선물은 없다. 돈 만원이라도 나 몰래 아이들 주머니에 찔려 넣어주며 토닥거려 줬음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중간에 내가 여러 번 잔소리를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자식이 효도할 때까지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 것처럼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까지 자식 역시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시기는 한 때일 뿐이다. 어느새 훌쩍 커버려 저만치 가 있다. 남편으로선 중요한 기회를 모두 놓친 셈이다.


사실 남편만 탓하기엔 그 역시 불쌍한 사람이다. 자식 생일이나 마누라 생일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번도 본 적 없이 자랐다. 그런 게 귀찮아 외면하던 본인 아버지의 모습만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주위에서 너는 그렇게 살지 마라, 그러다 나이 들어 후회한다 이렇게 말해 준 이도 없다. 하지만 나 역시 똑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걸 핑계로 삼긴 역부족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지난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남편이 점점 더 아이들을 그리워한다는 게다. 아이들에게 가끔 메시지를 보내고 이런저런 상품권도 챙겨 보내며 뒤늦은 애정 표현을 하고 있다.



한 달 전 집에 잠시 다니려 온 딸애와 함께 쇼핑 중이었다. 아이와 내 옷을 사러 나온 것이지만 남성복을 보니 남편 생각이 절로 났다. 고질병인 궁상을 절대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 행색이 갈수록 초라해져만 가고 있다. 같이 나가 옷을 골라주고 싶어도 가격을 보면 역정부터 낸다. 남편에겐 만원이 넘어가는 티셔츠는 쳐다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 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지 배우자인 나로선 같이 지내기 참 힘든 상대다. 마침 세일을 해서 가격도 괜찮고 남편에게 잘 어울릴 듯 한 옷이 눈에 띄었다.



아이에게 한 달 뒤 아빠 생일이니 엄마랑 돈을 반반씩 내서 네가 선물하는 걸로 하자고 했다. 물론 내가 다 내도 되지만 어떻게든 아이의 흔적을 선물에 입히고 싶었다. 아이는 가격을 슬쩍 보더니 그냥 자기가 다 계산하겠단다. 혼자 부담하긴 가격이 좀 나가서 같이 내자고 했더니 과외 아르바이트 한 시간만 더 하면 된단다. 아이가 하는 말이 참 고마웠다.



직접 건네주면 아빠가 더 좋아할 거라 했지만 아이는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마침 인기 품목이라 사이즈가 없어 따로 주문해야 했다. 옷은 아이가 기숙사로 돌아간 이후에야 집으로 배송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그걸 보고 여간 흐뭇해하지 않는다. 가격표를 보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용돈도 많지 않은데 뭐 하려 이런 걸 샀냐며 혼자 중얼거릴 뿐이다. 아이가 잊지 않고 자기 생일을 챙겨준 것에 몹시 감격한 듯하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자니 왠지 짠해온다. 자식이 뭐라고. 그럴 거면 진작에 좀 잘하지.



처음으로 맞이하는 둘 만의 생일상이다. 아이들도 없는데 굳이 케이크는 만들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남편이 좋아하는 걸로만 상을 차렸다. 밥을 먹으며 남편이 조금 전 둘째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말한다. 얘기하는 남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 오른다. 그래, 맘껏 좋아해라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큰애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단다. 분명 내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알았다고 답이 왔는데 지금까지 뭐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게 '이 놈의 자식이'란 소리가 나온다.

"바쁘겠지"

남편이 애써 큰애를 두둔한다.



얼마뒤 남편의 휴대폰이 울린다. 가만 들어보니 큰애랑 통화하는 게 분명하다. 그냥 문자만 보내도 되는데 그래도 기특하게 아빠 생일이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여태껏 내 노력이 헛수고만은 아닌가 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수능 때도 그렇고 동생 생일 때도 따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아서 간단한 선물과 용돈을 지 동생에겐 보내주고 있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나. 어쩜 아빠 생일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통화가 끝나자 남편은 나에게 다가와 살짝 취조하는 투로 묻는다. 조금 전 아직 큰애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자기 말에 혹시 내가 큰애에게 따로 연락한 건 아니냐고.



끝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어야 멋져 보이겠지만 거짓말엔 영 자신이 없다. 아니지, 어차피 난 일찍 감치 아이들에게 얘기했으니 따지고 보면 거짓말도 아니다. 하지만 이 아저씨 정말 눈치가 없다. 그럼 이때까지 아이들이 알아서 그렇게 해왔을 거라 생각했단 소린지. 이제껏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한테서 선물 받아 온 것도 다 내 덕분인지 정말 몰랐단 말인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그렇고 그냥 가만있으면 되지 나에게 확인은 또 왜 하려고 하는지. 묻지 않으면 계속 모른척하려 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답답함에 큰 소리가 나온다.

"나야 아침 댓바람부터 오늘이 아빠 생일이라고 아이들에게 알려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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