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커피 한잔

by 코니

오전 원어민 영어 회화수업은 언제나 똑같이 서로의 아침 식사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걸로 시작한다.

"What did you have for breakfast?"

강사가 누군가에게 먼저 묻으면 질문을 받은 사람이 대답을 하고 그 옆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다시 답하고 이렇게 전달 전달하며 한 바퀴를 빙 돈다. 하지만 대부분 아침은 간단히 먹고 오기에 매주 다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제발 좀 안 했음 하는데 강사는 본격적인 수업 시작 전 일종의 워밍업이라 생각하란다. 워밍업 치고는 수년 동안 너무나 똑같아 지겹기까지 한데 강사 또한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나의 경우도 역시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 두 잔의 커피와 양배추 샐러드, 몇 종류의 과일 조각들 그리고 빵. 달라지는 게 있다면 토스트나 샌드위치의 종류 정도. 다른 사람들의 역시 별 변화 없는 아침 메뉴를 듣다 보면 나처럼 커피를 즐겨 마시는 이들이 간혹 있다. 그러면 강사는 또 이렇게 습관적으로 묻곤 한다.

"Are you a coffee person or a tea person?"




나는 차와 커피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하는 그런 얄궂은 기로에 서게 된다면 나의 선택은 단 일초의 주저함도 없이 커피이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뭐라 할까... 뭔가 꼭 해야 될 무언가를 빼먹은 것 같은 그런 찝찝함이 든다. 커피를 마셔야 비로소 본격적인 나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카페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각성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커피는 나에게 심적인 편안함까지 가져다준다. 그래서 매일 아침 숲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커피부터 내린다. 간혹 그 일이 너무너무 귀찮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아주 가끔 그냥 1인용 더치커피 파우치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점심때 먹을 것까지 한꺼번에 내려서 밀폐형 유리병에 보관한다.



커피와 함께 하는 아침


맛있는 커피를 먹기 위해선 우선 원두 선택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어느 날 집 근처에서 가격까지 착한 로스팅 가게를 우연히 발견하는 행운이 내게 찾아왔다. 그전까진 줏대 없이 여기저기서 그냥 추천해주는 대로 원두를 샀던 나는 이번엔 기필코 나만의 원두를 찾고 말겠단 의지에 불타 있었다. 내 입맛에 맞는 원두를 찾기 위해 근 1년이란 시간을 들여 그곳의 거의 모든 종류의 원두를 사서 마셔봤다. 콜롬비아 수프리모, 과테말라 안티구아, 탄자니아 AA, 만델링, 시다모, 케냐 AA... 뭐가 뭔지 모르기에 직원에게 묻기도 하고 메뉴판 옆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설명을 참고하기도 했다. 허나 설명처럼 과일향이나 초콜릿향이 난다는 건 아무리 마셔봐도 나 같은 비전문가에게는 도저히 느끼기 어려운 맛이었다. 내가 아무리 장금이는 아니라 하나 내 입맛에 과일향이 조금이라도 느껴져야 과일향이 난다고 하지. 그러나 가게에서 적극 추천하던 스모크 향이 너무 강하거나 묵직한 것들은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반면 무겁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은은한 예가체프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비록 예가체프가 품고 있다는 과일의 상쾌한 신맛과 부드럽고 짙은 꽃향기는 여전히 내 혀에는 미스터리지만. 그 후 몇 년간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고 예가체프만 찾게 되었다.




한때 커피에 빠져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잔뜩 빌려 읽었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땐 작은 브런치 카페를 하나 차려볼까 하는 마음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라테 아트도 배우고 심지어 가게로 할만한 작은 주택까지 보러 다녔다. 코로나만 유행하지 않았음 글쎄... 뭔가 저질렸을지도 모른다. 당시 도서관에서 빌린 책중 점 드립 추출에 관한 책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 책이 나에게 커피의 신세계를 열어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점 드립 기법을 이용한 핸드 드립은 책으로만 보고 따라 하기엔 좀 어려워 보였으나 읽다 보니 커피 메이커로도 충분히 핸드 드립의 맛을 흉내 낼 수 있는 비법이 숨어 있었다. 당시 커피를 내리기 위해 오래된 낡은 필립스 커피 메이커를 이용하고 있었기에 무척 반가웠다. 요즘도 커피 메이커를 이용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잠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보통 커피 메이커의 작동 방식은 분쇄 원두를 넣고 물을 가득 부은 후 스위치를 누르면 끝이다. 하지만 맛있는 커피를 내리기 위해선 스위치를 누르기 전 핸드 드립처럼 커피 뜸을 들여 일명 커피 빵을 만들어주고 물도 정량의 3분의 1 정도만 붓고 추출해야 한다. 물을 많이 부어 추출량이 많아지게 되면 커피의 잡내까지 같이 추출되기에 뒷맛이 좋지 않다. 이제껏 커피의 잡내가 뭔지도 모르고 마시다가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커피를 내려 마셔보니 알게 되었다. '아! 그게 바로 커피의 잡내였구나'라는 걸. 추출량을 적게 한 뒤 본인 입맛에 맞게 따뜻한 물을 섞어 마시면 그냥 커피 메이커를 이용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깊은 맛이 나게 된다. 정말 신기했다. 똑같은 원두에 똑같은 기계인데 커피 맛이 이렇게 업그레이드가 될 줄이야.


한때 열심히 연습하여 나름 라떼 아트 수업의 우등생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나에게 커피를 내려주던 커피 메이커는 가장 일반적인 보급형 모델이었다. 스물대여섯 살, 월급이 몇 푼 안되던 막내 디자이너가 살 수 있던 제일 싼 제품이었다. 언젠가 고장 나면 나를 위한 호사로 좀 더 비싸고 좋은 기계로 바꾸고자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어찌나 튼튼하게 잘 만들어졌는지 25년이 지났음에도 고장하나 없이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것을 보니 차마 내팽개칠 수가 없었다. 이십 대 중반부터 오십이 될 때까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를 위해 거의 매일 생명의 물과 같은 커피를 내려준 그 정성이 너무나 고맙고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2년 전, 백화점 갈 때마다 갖고 싶어서 들었다 놓았다 하던 핸드 드립용 주전자를 딸애가 눈여겨보았다가 생일 선물로 사다 주었다. 물론 백화점이 아닌 모든 물건들이 다 있는 곳에서 오천 원이란 거금을 들여서 말이다. 결국 먼저 배신을 한건 미안하게도 나였다. 지금 필립스 커피 메이커는 자기 색과 똑같은 검정 비닐에 싸인 채 싱크대 한구석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함도 잠시, 드디어 어깨너머와 책을 통해 배운 것들을 짬뽕시킨 나만의 핸드 드립으로 예가체프를 내려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커피 메이커를 이용할 때랑 핸드드립으로 내릴 때랑 내 혀가 다르게 반응한다. 이제껏 맛있게 마셔왔던 예가체프가 그리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달라진 추출법에 따라 원두도 바꿀 때가 온 것이다. 또다시 시간과 품을 들여 몇 종류의 원두들을 테스트한 결과 결국 나의 최종 선택은 케냐 AA로 정해졌다.




주전자에 물이 끓고 있는 사이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열심히 돌린다. 솔직히 이 부분이 커피를 내리는 모든 과정을 통틀어 가장 귀찮은 부분이다. 하지만 먹기 직전 막 분쇄한 원두의 신선한 맛과 향을 포기하지 못해 팔이 아프고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분쇄된 원두는 결코 사지 않는다. 캠핑이나 낚시를 가서 핸드 드립 커피를 내려 먹기 위해 몇몇 도구들을 챙겨 간 적이 있다. 그라인더는 부피와 무게가 좀 있는지라 원두는 그냥 집에서 분쇄를 한 후 지퍼백에 담아 가서 추출을 했다. 기대를 잔뜩 하고 마시는 자연 속에서의 커피 한 모금은... 기대에 못 미쳤다. 내가 생각하던 그 향이 아니었다. 아무리 지퍼백에다 밀봉을 했다 해도 이미 공기 중으로 향이 많이 날아간 상태였다. 꼭 맛과 향 때문이 아니더라도 엔틱풍의 그라인더 역시 애정 어린 오래된 친구인지라 하루에 한 번씩 꼭 어루만져줘야 한다. 사각사각 원두 갈리는 소리가 어느새 빈 기계 돌리는 소리로 바뀌기 시작하면 이미 부엌은 물론 거실까지 구수한 원두향으로 가득해지기 시작한다. 뒤를 이어 드리퍼에 여과지를 얹고 따뜻한 물로 한번 헹구어 낸 후 분쇄된 원두를 여과지 위에 쏟는다. 그다음 과정에는 나만의 조금 특별한 방법이 하나 숨어 있다.



결혼 당시 구입한 독일산 유리 포트와 어느새 30년이 다되어가는 그라인더는 모두 나의 애정 어린 오래된 친구들이다


여과지 위 원두가루 한가운데를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처음엔 그 이유도 잘 모른 채 그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인 '카모메 식당'에서 하던 걸 보고 그냥 그대로 따라 했다. 낯선 핀란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사치에의 가게에 어느 날 한 괴짜 같은 손님이 와서는 커피를 주문한다. 커피를 맛보더니 더 맛있게 내리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내가 따라 하고 있는 바로 그 행동을 하며 동시에 '커피 루왁'이란 말을 주문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사치에는 의아해하면서도 손님이 가르쳐준 엉터리 같은 방식대로 커피를 내려봤더니 신기하게도 맛이 더 좋았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커피에 대한 찬사와 함께 원두를 바꿨냐는 말까지 듣게 된다. 나 또한 약간 의심스럽긴 했지만 별 어렵지 않은 거라 그리고 워낙 영화에 대한 기억이 좋아 재미 삼아 계속 따라 하고 있다. 주문까진 외우지 않지만 손가락으로 여과지 한가운데를 살짝 눌러준 다음 커피 뜸을 들인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 이유 있는 행동이었다. 사실은 원두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드리퍼의 중앙 부분에 뜸이 잘 들도록 하기 위한 비법이란다.



영화 카모메 식당 중에서


커피 뜸이 잘 들어져 커피 빵이 봉긋 이쁘게 부풀어 오르면 딸이 선물한 주전자로 천천히 커피를 추출하기 시작한다. 숨을 깊게 한번 들어마신 후 더 이상의 호흡은 멈추고 오직 주전자의 물줄기에만 집중해서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가늘게 물줄기를 만든다. 처음엔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5번 원을 돌려나간다. 드리퍼에서 커피가 한, 두 방울 정도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후 이젠 반대로 바깥에서 안으로 4번 원을 그리면서 들어온다. 점 드립이 어려운 사람을 위한 최상의 방법으로 책에서 읽고 따라한 것이다. 커피 맛은? 물어볼 것도 없이 내겐 최상의 맛이다. 어지간한 카페의 커피보다 훨씬 깊은 맛이다.





이 맛있는 커피를 매일 같이 나눌 사람이 있음 참 좋으련만 남편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마시는 인스턴트 봉지 커피가 다이다. 예전엔 가끔 이런 상상도 했었다. 남편과 아침 산책을 손잡고 다녀온 후 남편은 커피를 내리고 나는 과일과 빵을 준비하고. 당신이 내려준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남편에게 애교 섞인 아부도 하고. 물론 상상 속의 남편은 뿌옇게 처리되어 누구인지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원하던 아침의 모습은 이런 거였지만 실상 우리 부부는 아침을 따로 먹는다. 나는 커피와 클래식 음악이 아침 식사의 친구인 반면 남편은 TV가 그러하다. 각자 편한 곳에서 편한 상태로 아침을 즐긴다. 서로의 취향이 확실한데 다 늙어 굳이 같이 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편뿐 아니라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랑 여러모로 취향이 참 안 맞았다. 그래서 커피의 맛을 좀 아는, 커피에 대해 같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 좀 더 매력적으로 와닿는다. 하지만 커피에 대한 아무런 주관도 없이 무조건 새로 생긴 곳이나 가격이 비싼 곳만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반감이 생기기도 한다. 단순히 커피 하나만으로도 상대방에 대한 많은 걸 읽을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coffee person이다. 나를 위한, 내가 내린 커피는 혼자서 마시든 둘이서 마시든 언제나 똑같이 맛있는 맛이다. 혼자 마셔도 전혀 외롭지 않고 둘이 마시면 또 둘이라서 좋은. 게다가 커피는 나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유일한 음식이기도 하다. '커피 루악' 같은 주문까지 외치진 않지만 소중한 나 자신이 마실 것이기에 매일 아침 주문을 외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해 커피를 내린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역시.






keyword
코니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팔로워 130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크리스마스 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