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와 ‘진정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by 현목

지난 구정 공휴일에 하루 근무해준 댓가로 직장에서 내게 준 하루의 ‘어프(off)’를 가지고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아내와 함께 영화 구경을 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나이 먹어서 그런지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소모하려는데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는 영화 보러가는 것이 십상입니다. 이번에는 조조 할인을 가려고 했습니다. 반값의 매력을 한번 음미해 보자는 거지요. 예상대로 관객은 별로 없었고 그나마 중년의 여인들이 몇몇이 보이고 나 같이 나이든 남자는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시작하자 갑자기 후쿠오카(福岡) 형무소가 나오고 윤동주가 회상하는 옛날의 일들이 오버랩되는 구도였다. 한참을 보다가 보니까 갑자기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짚어보니 작금의 나에게는 영화도 그렇고 텔레비전도 그렇지만 도무지 진중한 드라마나 프로는 볼 기회가 별로 없은 셈입니다. 항상 예능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웃기고 무언가 자극을 주고, 음식 먹는 것으로 눈과 식욕을 부추기는 프로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그도 그럴만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점점 진행되자 그런 생각은 없어지고 나도 진지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거지반 다 아는 것이라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내 머리에 몇 가지 감상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젊은 주인공인 윤동주와 송몽규, 그리고 윤동주를 취조하던 형사가 어떻게 일본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지 놀라웠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해 ‘어피너티(affinity)’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어로 말하는 것에 대해 예민한 편입니다. 아무리 일본말이 한국 사람에게는 친숙할 수 있다고 해도 대사 몇 마디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사가 한두 마디가 아니라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데도 거의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캐릭터가 너무 상반되어 인상적이었습니다.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머리가 좋아 보였습니다. 그는 교토(京都) 제국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했으나 윤동주는 실패하여 릿쿄(立敎) 대학을 갔고 나중에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으로 편입하게 되고 이 대학을 다니다가 후코오카 형무소에 가서 병사를 하게 됩니다. 해방되던 해로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 일입니다.


윤동주는 뭔가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여성적이고 부끄러워하는 얼굴과 어정쩡한 행동을 보이는 반면 송몽규는 사회 정의에 불타고 동료들을 설득하여 독립운동에도 끌어내는 등 남성적인 리더십을 보여 주었습니다.


셋째는 이 영화가 컬러였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흑백으로 인해 1940대 이전의 조선의 상황이 아련하게 잘 연결되고 인물들의 활동이 무언가 신비한 베일에 싸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무언가 고전을 읽는 듯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게 했습니다.


넷째 릿쿄 대학에 다닐 때 영문학 교수 밑에 있던 여제자의 모습이 내 머릿 속에 선명히 남았습니다. 그녀는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해 호감을 가졌고, 일본에서 조선어로 시집을 발간할 수 없어서 윤동주가 자기 시를 영역하여 영국에서 시집을 내는 데―비록 실패했지만―헌신적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일본 여자다운 깨끗하고 상냥한 말씨와 단정한 행동거지, 무언가 지적이고 귀티가 나는 얼굴, 특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 보일듯 말듯한 미소가 내 눈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습니다.


다섯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 윤동주에게 호감을 가졌던 여인과, 릿쿄 대학과 도시샤 대학에 다닐 때 동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던 여인―둘 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와의 사이에, 처음에는 분명히 무슨 ‘러브 어페어(love affair)’가 일어나리라 당연히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의표를 찌르고 두 여자와 윤동주가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의 주고받음은 있었으나 싸구려(?) 연애 사건으로 몰아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미세한 감정의 교류가 눈물 질질 짜면서 사랑하니 어쩌니 하면서 이별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보다 백배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섯 째 일제 시대 당시 의식 있는 청년들 혹은 지식인들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에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일제를 증오하면서도 그 일제의 제도 속에 들어가서 고급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 속에 들어가는 꼴이 되지만 한편 달리 생각하면 결국은 일본의 교육을 통해서 식민지 백성을 순화시키는데 동참하는 꼴이 되는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곱 째, 이것이 사실은 내가 영화 「동주」를 보면서 말하고 싶은 대목입니다. 윤동주는 친구인 송몽규의 적극적인 성격에 비해 소극적이며 그는 또한 그렇게 정치적인 관심이 있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송몽규와 친구인 관계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개입하게 되어 결국은 후쿠오카 형무소로 가게 된 원인 중에 하나가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영문학을 하면서 한글로 시를 쓰는 시인인 것입니다. 그런 만큼 영화에서 그의 유명한 시들이 읊어지고 거기에 적절한 장면들이 펼쳐졌습니다.


그의 시를 보면서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은 그가 시를 쓰는 그 ‘진정성’이었습니다. 무언가 멋있는 시를 지으려고 머리를 싸매고 머리를 굴려서 구성을 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고르고 독자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기상천외한 은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마음에서 요동치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그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그의 삶이 시였습니다.


여기서 내가 어줍잖게 시를 쓴다고 한 세월이 머리 속을 주마등 같이 지나갔습니다. 나는 시를 멋있게, 남들이 감동할 수 있는 시를 쓴답시고 무리한 직유나 은유를 나의 재주를 총 동원하여 썼습니다. 심지어는 써놓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싯귀라도 있으면 그걸 혼자서 합리화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나마 대부분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한 것들뿐이라 새삼 부끄러웠습니다. 영화 「동주」를 보면서, 나의 의식의 저 안 보이는 데서 내가 이제껏 끄적여 놓았던 시상의 꼬투리들을 이제는 다시 들쳐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 산의 구름처럼 조금씩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못쓰면 못쓰는 대로 나의 인생의 황혼녘에 내 가슴 속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이미지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어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면서 나는 영화관을 걸어 나왔습니다. 오던 비가 그치기는 했지만 아직 햇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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