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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겨울철, 장에 좋은 음식

by 청아

"청아야, 깍두기도 꺼내줘. 나 청아가 만든 깍두기 먹고 싶어."


남편이 내가 차린 밥상을 살펴보다가 깍두기가 없는 걸 알아채고 말했다. 내가 만든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된다. 한 사람이 내가 만든 음식을 소중히 여겨주고 기뻐해 주는 마음이 등불처럼 나의 세계를 밝혀줄 줄은 몰랐다. 그런 남편의 자잘한 말들이, 무심한 듯한 부탁들이 내 안의 무기력증을 밀어내고 내 손을 부엌으로 이끈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신이 나서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통을 꺼내 깍두기를 반찬 그릇에 담는다. 작은 국자로 빠알간 국물을 넉넉히 떠서 함께 얹는다.

"쨘! 주문하신 깍두기 여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님."


겨울이 되어 무가 단맛을 품기 시작하면 우리 집 밥상에 깍두기가 자주 올라온다. 깍두기는 남편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음식이었다. 남편은 어릴 때 중이염을 심하게 앓았고, 몇 년간 항생제를 복용하면서 장이 약해졌다. 그런 남편에게 어떤 음식이 좋을지를 고민하다가 만난 것이 깍두기였다. 무는 장 건강에 좋다고 했고, 거기에 발효까지 더했으니, 깍두기만큼 남편에게 좋은 음식이 또 있을까 싶었다.


처음 깍두기를 만들던 날이 떠오른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사람마다 만드는 방식이 다 달랐다. 저마다 "이렇게 해야 맛있다", "저렇게 해야 맛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것이 맞는지도 몰랐고, 요리를 해본 적 없는 내가 감당하기엔 과정이 버거웠다. 새댁이던 나는 칼질도 서툴러 무 한 덩어리 써는 데에도 진땀을 흘렸고, 찹쌀가루를 사다가 풀을 쑤고, 무를 절이고, 북어채로 국물을 내는 과정이 정신없었다. 아직 깍두기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데 설거지만 잔뜩 쌓였다.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 한 입 넣었는데,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다.

이 맛이 아닌데…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묻고 싶었지만, 전화번호가 있을 리 없었다. 영혼에게도 전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침대까지 터덜터덜 걸어가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만들며, 실패하며,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깍두기 맛을 찾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내 나름의 심플한 레시피에 도착했다. 그 과정이 길었기에, 이 깍두기는 내게 유독 특별하다.



보통 깍두기를 만들 때는 무를 절이는 과정부터 시작하지만, 나는 절이지 않는다. 배추김치는 절여야 하지만, 무는 다르다. 무에서 배어 나오는 물이 그대로 국물이 되어야 제 맛이 난다. 절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드는 과정이 훨씬 단순해졌고, 익어가며 자연스레 빠져나오는 그 물이 마치 동치미 국물처럼 향긋하고 달다.


그 국물이 양념이 된다. 별다른 재료를 넣지 않아도 된다. 흔히들 넣는 양파, 파, 사과, 북어 국물, 생새우 같은 것들은 필요 없었다. 찹쌀풀을 쑤는 수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찬밥 한 덩어리, 마늘 한 주먹, 멸치 액젓 한 컵, 까나리 액젓 조금, 생강가루 한 꼬집, 매실청 한두 큰술, 설탕을 믹서에 갈아 양념을 만든다. 무가 얼마나 달아졌느냐에 따라 설탕의 양을 조절하면 된다. 새우젓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다. 젓가락으로 살짝 떠서 맛을 본다. 단맛, 짠맛, 신맛의 균형을 맞춘다. 다만, 무가 물을 머금고 있으니, 짠 맛은 살짝 강해야 한다.

양념이 간결해지면, 무의 맛이 곧장 다가온다. 돌려 말하지 않는다. 군더더기 없는 말처럼, 무도 본래의 맛을 드러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깍두기 국물은 한 숟가락 떠먹어도 좋고, 찌개에 넣어도 좋고, 밥 위에 올려 비벼도 좋다. 어떻게 먹어도 맛이 살아 있다.


무를 깍둑썰어 김치통에 반쯤 채우고, 고춧가루를 먼저 버무려 색을 들인다. 그다음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 상온에 하루쯤 지나면 익는 냄새가 나는데, 이때 뚜껑을 열지 않고 그대로 냉장고에 넣는 것이 좋다. 유산균이 잘 자라려면 공기와의 접촉을 줄여야 한다.


남편과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문득 남편이 깍두기 국물을 떠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결혼 전에는 김치나 깍두기 국물을 떠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절이지 않은 무로 만든 깍두기 국물이 특히 맛있어서일까, 남편도 어느새 국물을 함께 먹기 시작했다.

서울 토박이 남편이 숟가락으로 깍두기 국물을 떠먹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구수하고 정겹다. 나는 혼자 피식 웃으며, 그 순간을 눈에 담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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