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4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단호박스프

겨울에 몸을 데펴주는 음식

by 청아 Jan 09. 2025

지난 1월 5일은 24절기 중 소한이었다. 
소한(小寒), 작은 추위라는 뜻이니 '대한(大寒)'보다는 덜 추운 날이려니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24절기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라 우리나라 기후와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대한이 1년 중 가장 추운 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소한 무렵이 가장 추운 시기라고 한다.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
즉, 소한 때가 대한 때보다 더 춥다는 뜻이다.


과연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았다.
"오늘 밤 영하 10도, 내일 밤 영하 12도. 이번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씨가 될 전망입니다."
게다가 중간중간 눈까지 예보되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눈송이가 한 송이, 두 송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도로가 얼어붙을 듯했다.


뉴스를 보자마자 남편을 불렀다. 

"오빠! 내일하고 모레가 이번 겨울 중에 제일 춥대요. 우리 앞으로 며칠 동안은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도록 먹을 거리를 단단히 준비해 놓아요."

"그럼 길이 얼기 전에 지금 당장 다녀오자!"


가게에 가서 겨울의 제철음식들을 위주로 신중하게 골랐다.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다른 때보다 하얗고 통통하고 싱싱해 보였던 굴, 요즘들어 줄기가 점점 튼실해지고 있는듯한 시금치, 묵직한 사과 한 봉지, 무우와 고구마 등등. 마음이 가는대로 장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그러다 진열대 한쪽에서 단호박을 발견하고는 문득 의아해졌다. 단호박은 여름이 제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나는 매년 겨울마다 단호박을 즐겨먹고 있었다. 


알아보니 단호박은 여름에 수확을 하지만, 막 수확했을 때에는 맛이 덜하다가, 몇 달 정도 시간이 지나면 수분히 적당히 빠져나가서 달아지고 쫀득해진다고 한다. 12월에서 2월이 단호박을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니,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단호박은 따뜻한 성질의 음식이라 여름보다 겨울에 더 잘어울린다.


단호박으로 만드는 우리 부부의 최애 요리는 단호박 스프다. 

만드는 방법은 쉽고 간단한데, 맛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하다. 얼마 전에 지인을 집으로 초대해 단호박 스프한 그릇을 대접해 드린 일이 있었다. 그 분은 한 입 드시고는 그 훌륭한 맛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에게 레시피를 물어 오셨다.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자, 그 심플함에 다시 한 번 놀라셨다.


먼저 단호박을 냄비에 끓여서 익힌다. 단호박을 물에 담가 놓고 센 불에서 끓이다가 물이 끓으면 냄비 뚜껑을 닫고 중약불에서 익힌다. 

이 때, 단호박이 너무 크면 오래 익혀야 하고 (40분 이상), 익힐 때와 씨를 발라낼 때도 큰 냄비와 큰 접시를 사용해야 해서 설거지가 많아져 번거로웠다. 식구 수가 많을 때는 큰 단호박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처럼 둘이서 먹을 거라면 양손의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살짝 큰 정도가 좋았다. 그 정도 크기라면 20~30분 정도면 충분히 다 익고, 작은 냄비를 사용할 수도 있다. 씨를 바를 때도 크게 일 벌이지 않고 대접 정도에서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팁은 단호박이 제대로 익지 않으면 맛이 덜하다는 것이다. 젓가락 하나로 찔러 보았을 때 젓가락이 쑤욱 들어가 힘들이지 않고 부드럽게 맞은편 끝까지 구멍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푹 익어야 한다.


단호박이 다 익으면 건져내어 좀 식힌 후 단호박을 반으로 잘라 씨를 숟가락으로 퍼내고 껍데기도 띄어낸다. 잘 익은 단호박에서는 껍데기가 쉽게 떨어진다.


믹서기에 단호박을 넣고 우유로 농도를 조절하면서 갈아준다. 농도는 취향껏.

우유 대신 아몬드유나 두유를 사용해도 되지만, 단호박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단연 우유다.


자, 이제 갈은 단호박을 다시 냄비에 붓고 약불에서 저어주는 동안 간을 맞추면 완성이다. 단호박 레시피 중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나의 단호박 스프의 맛의 비결은 죽염이다. 죽염의 짠맛은 다른 일반 소금보다 둥글둥글한 것 같다. 그리고 죽염 자체에 단맛과 감칠맛이 있어서, 단호박의 맛을 훌륭하게 업그레이드해 준다. 죽염을 넣은 단호박 스프는 한 입 먹었을 때 '어? 맛이 왠지 모르게 고급진데?' 하는 인상을 준다.

1월에는 단호박 자체가 달고 맛있어서  단호박과 소금만으로도 훌륭한 맛을 낼 수 있지만, 만약 단 맛을 더 원한다면 설탕보다는 약간의 꿀로 풍미를 더해주는 것이 단호박과 잘 어울린다. 


단호박 스프를 만드는 방법은 많다. 버터를 넣고, 생크림을 부어 진한 풍미를 더하는 사람도 있고, 마늘과 양파를 볶아 감칠맛을 살리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손맛이 다르고, 입맛이 다르니까. 

나는 단호박, 우유, 소금, 꿀, 딱 이 네 가지만 넣는다. 불필요한 것이 섞이지 않을 때, 재료는 자기 빛깔을 더욱 또렷이 드러내는 것 같다. 재료가 좋을수록 그렇다. 더하지 않아도 충분하고, 꾸미지 않아도 완전하다.


갓 끓여낸 단호박 스프를 검은 자기 그릇에 담았다. 해가 아침을 깨우며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할 때, 그리고 저녁이 되어 내일을 기약하며 스러질 때, 그 순간마다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던 그 색이 나의 그릇 안에 담겨 있었다.

"오빠, 맛있게 드세요."

남편이 한 숟가락 떠넣고는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말보다 먼저 다가와 닿는다. 그의 얼굴에 단호박 스프의 환한 노란빛이 번진다.

월요일 연재
이전 03화 양배추감자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