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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 이야기

30화 나는 선택권이 없어?

by 작가

30화 나는 선택권이 없어?


남편이 주문한 닌텐도 게임팩이 도착했다.

준이는 학교를 마치고 현관에 놓여있는 택배상자를 발견했다.


“왔어!! 드디어 왔다!!”

준이는 슬라이딩하듯 현관으로 달려가 상자를 낚아챘다.

준이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행복이 준이의 품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검도 가는 날이었다.

시간표는 잔인했다.

게임팩은 도착했고 검도는 한 시간 후였다.


“엄마…”

준이는 게임팩을 꼭 안은 채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은 검도 안 가면 안 돼?”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냥… 나 검도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준이목소리도 진지했다.

하지만 내 귀엔 “오늘 게임하고 싶어”로 들렸다.


“소질이 없어?”

“응. 난 싸우는 거보다 계산이 좋아.”

“계산?”

“응. 나 수학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수학학원 보내죠.”

그 순간 나는 뿜을 뻔했다.


검도에서 수학으로 너무 급진적이지 않나?

“준아, 검도는 네가 하겠다고 한 거잖아.”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생각은 언제나 바뀔 수 있지만 선택엔 책임이 따라.”

준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책임?”

나는 천천히 말했다.


“너는 검도를 하기로 ‘선택’했어.

선택은 멋진 거야.

하지만 한 번 선택했으면 그 결과는 네가 감당해야 해.

하기 싫다고 그만두면 나중에 진짜 하고 싶은 걸 만나도 버티기 힘들어.”


준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준이의 눈은 여전히 닌텐도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마도 복잡한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검도 가면 2시간 손해… 안 가면 혼남… 가면 게임 늦게 함…’


잠시 후 준이는 결심한 듯 말했다.

“알았어. 갈게. 대신 구몬은 내일 풀게 해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요것도 니 선택이야.”


그날 저녁 검도장에서 돌아온 준이의 얼굴엔 약간의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검도복 안에는 땀방울이 고여있었다.

‘소질이 없다’던 아이의 태도 치고는 의외로 열심히 했다.


“준아, 어땠어?”

준이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힘들었는데… 기분은 좋아.”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래 이거야.

아이에게 꼭 가르치고 싶던 게 바로 이거였다.

‘선택은 기분이 아니라 책임으로 완성된다.’


집에 돌아와 그는 다시 닌텐도를 꺼냈다.

“이제 해도 되지?”

“그럼. 네 책임 다했으니까.”

그는 기쁘고 후련한 표정으로 앉아 게임을 했다.


그날 밤 나는 거실에 앉아 생각했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건,

그 선택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일이구나.’


요즘은 아이들에게 부모가 ‘선택’을 일찍 가르친다.

우리 어릴 때는 늘 명령이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본인이 선택한다.

하지만 선택엔 항상 ‘책임’이 붙는다.

그걸 가르치지 않으면 선택은 단지 변덕이 된다.


준이와 나에게 이번 일은 그걸 배우는 수업이었다.


‘엄마로서의 선택’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걸.

하기 싫어도,

지치더라도,

매일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게되었다


다음 검도 가는 준이는 제법 능숙하게 도복을 챙겼다.

“오늘은 지지 않을 거야.”

“누구한테?”

“나한테.”

그 대답이 너무 귀엽고 멋졌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 준이가 물었다.

“엄마, 나 이제 선택권 있어?”

나는 웃었다.

“그럼."

그는 씩 웃으며 도장을 향해 달려갔다.


닌텐도는 오늘도 전원 켜진 채로 거실에 있다.

준이가 당당하게 다시 하길 기다리듯이 .


인생의 진짜 ‘게임’은

스스로 선택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임을

우리는 함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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