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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n 18. 2021

전업주부 탈출,
잠깐이지만 직장인 맛 좀 보았습니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다.    구인 광고 사이트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그냥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듯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가 있을까 열심히도 찾는다.   하긴 별일 없을 때도 취미처럼 이런 사이트를 돌아다니긴 했다.


이번에도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별일 아니었겠지만 갱년기를 지나고 있는 나는 그때도 내 안에 화가 가득했었던 것 같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또 구인 광고 사이트를 보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연봉도 꽤 받는 외국인 회사에서 (그 당시는 영어만 좀 하면 취직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 별 스트레스 없이 일도 재미있게 하고 했는데 결혼하면서 경력 단절이 됐다.  결혼하면서 느닷없이 스리랑카로 가서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전업 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남편 무역 일로 스리랑카에 8년 정도를 살면서 딸 둘을 낳았다.  일 년 내내 날씨는 엄청 덥고 습하지만, 인건비가 싼 덕분에 일해주는 아줌마, 애들 봐주는 아줌마, 또 운전기사 아저씨도 있었다.   지금은 거기도 인건비가 많이 올랐다고 들었는데 그 당시는 한 달에 US$30 정도로 엄청 쌌다. 그래서 참 편하고 쉽게 아이 둘 낳아 키운 것 같다.  어찌 보면 매일 32도가 넘어가고 내란으로 불안한 후진국에서 산다는 것이 아찔하고 힘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외국인이 살기에는 아주 좋은 나라였다.  


스리랑카에서는 회사 생활 같은 것을 할 여건이 전혀 아니었기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수학을 전공한 덕분에 수학 과외는 끊임없이 했었다.  한인학교에서 수학 선생님도 하고. 그곳 한인 사회에서 그때만 해도 수학 전공자가 별로 없었기에 나한테 기회가 주어졌던 것 같다.  


8년 후 이곳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애들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고, 인건비 엄청 비싼 이곳에서 일하는 아줌마는 당연히 꿈도 꿀 수 없었다.   갑자기 애들 뒷바라지에 밥하랴 집안일하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스리랑카에서는 저렴한 렌트비로 마당 있는 큰 집에서 살았었는데, 여긴 좁아터진 아파트가 비싸기는 또 왜 이리 비싼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민 초기에 우울증도 좀 왔었던 것 같다.  그때도 좁은 아파트에서 집안일에 애들 남편 뒷바라지에 많이 답답했겠지.  일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찾아보고 밴쿠버 다운타운 어학원에 마케팅 쪽으로도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는데 연락이 왔었다.  그때만 해도 30대로 젊었으니 취직할 확률이 좀 높긴 했다.  

남편한테 말도 안 하고 슬쩍 가서 인터뷰를 봤는데, 사장이 맘에 들어하며 당장 내일부터 나올 수 있냐고 한다.  너무 쉽게 되니까 또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는 있겠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았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얘기를 꺼냈는데 펄펄 뛴다.  애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하면서.  지금 막 초등학교 들어간 애들한테 엄마는 꼭 필요하다. 어차피 월급에서 세금, 차비, 점심값 빼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내가 일하러 나가면 안 되는 이유가 열 가지도 넘었다.  그냥 내가 나가는 게 싫은 거지.  결국 엄청 보수적인 남편의 반대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어린애들을 놓고 일하러 나가는 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긴 했다.    매일 점심 도시락도 싸줘야 하고, 학교 등하교도 책임져야 한다.  캐나다는 12살이 되기 전까진 법적으로 어른 없이 애들끼리 다닐 수 없게 되어있다.  인건비가 비싸니 아이들 봐주는 분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애들이 커가면서 나만의 시간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정 반대였다.  두 딸이 리듬체조를 시작하면서, 점심에 간식에 운전에 여기저기 시합 따라다니고 거의 매일 스케줄이 빡빡하게 돌아갔다.  그러다 한 명씩 대학생이 되고 갑자기 한가해졌다.  이제 내 일을 도전해볼 수 있지만 이제는 내 나이 오십이 넘어버렸다.   


그러던 중 구인광고 사이트를 다시 찾아보게 된 것이다.  한데 예전과 달리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나이도 있지, 영어도 완벽하게 하는 건 아니지, 경력은 완전 단절이지. 풀타임은 몸이 힘들어서 못하겠고.  몇 페이지를 넘겨가며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겨우 하나 찾은 게 있었다.  학원 수학 선생님.  수학은 영어를 많이 안 써도 되니 얼렁뚱땅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어딘가를 일하러 나가고 싶은 것이니 이게 어쩌면 딱이다.  그렇다면 학원에서 몇 시간씩만 파트타임으로 하면 되겠다 싶었다.


이력서를 내고 바로 인터뷰 연락이 왔다.  그래도 난 나이 때문에 괜히 위축되었다.  살짝 민망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꽤 오래 봤다.  새로 문을 여는 학원이라 사람이 급하게 필요했는지 언제부터 나올 수 있냐고 물어봤다.  아직 남편과 살짝 다툰 후 서로 말을 안 하고 있는 상태라 의논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먼저 대답을 해버렸다.  다음 주부터 나올 수 있다고.  확실히 갱년기에 접어든 나는 예전보다 용감했다.


집에 돌아온 후 분위기를 살피다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나 다음 주부터 일하러 나간다.  수학 선생님 하기로 했어.'  속으로 많이 놀랐을 텐데 별 내색은 안 하고 '어, 알았어' 대답한다.   지금 우리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자기도 이번엔 딱히 나를 못 나가게 할 명분이 없었겠지.  내 갱년기가 좀 겁나기도 했을 것이고.  하긴 공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남편도 늘 찬성했었다.


꿈에 그리던 환상의 직장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25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다가 다른 직장인처럼 사무실로 일하러 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자존감이 확 올라가는 포인트였다.  


일은 재미있었다.  재미있으니 시간도 금방 가고 어린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니 내가 에너지를 받는다.  몇 달 지나고 나니 총괄 매니저를 해달라고 한다.  아무래도 나이 좀 있고 융통성 많은 아줌마가 학부모들과 대화하기도 좋고, 매니저로 적당하다 싶었나 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풀타임으로 책임감 있게 매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좀 힘들어서 거절을 했다.


그렇게 일 년 넘게 일을 했는데, 코로나도 터지고 내 몸도 예전 같지 않고 해서 그만두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타향 살이 하면서 조금은 위축되어있던 나 자신이 당당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엔 올라간 자존감이 좀 오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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