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6)

사헌부가 한명회를 탄핵하려면 모두 자리를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하네

by 두류산

6장


1472년 성종 3년 8월.

가을 추수와 한가위를 앞두고 폭우를 동반한 맹렬한 강풍이 불어왔다. 수확을 앞두고 수재(水災)와 풍재(風災)가 겹쳐 모든 것을 읽은 백성들은 망연자실했다. 기근이 뒤따라 덮쳐 굶어 죽는 백성들이 수만에 이르렀다.


성종은 한명회에게 재해가 특히 심한 경기도의 진휼사(賑恤使)로 명하여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돕고 구제하도록 했다. 진휼의 일을 맡긴 것은 흉년에 굶주리고 있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나라의 최고 권세가로서 부족함이 없이 지내니 재해를 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아픔을 실제로 느낄 수가 없었다. 도성 가까이에 있는 경기도의 백성들을 살펴보러 나선 한명회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그대로 드러내며 수많은 수행원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다녔다. 한명회를 따르는 무리들의 말이 거의 20여 필에 이르렀다.


한명회의 긴 행렬이 지나갈 때 백성들은 길을 비키고 엎드리면서 불평을 쏟아내었다.

“백성들은 배가 고파 죽어가고 관청에 남은 곡식이 없는데, 저 많은 입을 먹이려면 얼마나 더 많은 백성의 배를 곯게 할까?”

사간원에서 진휼사의 순찰로 생긴 백성들의 폐단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청컨대 차라리 굶는 백성을 도와주는 역할인 진휼사를 그만두게 하고 속히 돌아오게 하소서."

이 일로 한명회의 체면은 조정 안팎에서 크게 구겨졌다.


한 달 뒤 성종 3년 9월, 백성들을 구제하는 현장에 나갔다가 망신을 당한 한명회는 또 한 번 구설수에 올랐다. 일의 발단은 병조정랑 김순성 때문이었다. 김순성은 자신이 강원도 평창 군수로 발령이 났음을 알고 불만을 가졌다.

“평창은 궁벽하고 산이 깊어 유배지로나 갈 곳이지, 어찌 고을 원으로 갈만한 곳인가.”

김순성은 병조판서를 겸직하고 있는 한명회를 찾았다.

“아내의 병이 깊어, 당장 부임할 수 없습니다. 저의 처지를 살펴 주십시오.”

한명회는 평소 심복으로 부린 김순성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우선 아들을 시켜 자네의 사정을 주상께 아뢰게. 그 뒤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임금은 김순성 아들이 올린 상소를 원상들에게 보여주고 의논하였다. 한명회가 나서서 아뢰었다.

“김순성의 처가 병이 깊음을 신(臣)이 잘 압니다.”

사헌부는 김순성이 아내의 병을 구실로 사직하고 임지로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즉각 임금에게 아뢰었다.

"평창 군수로 나가게 된 김순성이 아내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으려고 하니, 청컨대 그를 국문하고 법에 의한 기한 동안 다시 임용하지 말게 하소서.”


예종 때 유자광이 ‘조정 신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직책을 받으면 일부러 사직하여 좋은 자리로 가려고 하는 염치없는 일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아뢴 이후, 사직을 하거나 파직을 당하면 6년 동안 다시 임용하지 아니하는 법을 엄하게 적용하였다.


사헌부는 임금이 김순성을 국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이유를 찾아보니, 한명회의 비호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사헌부 젊은 대간들은 김순성은 물론 이를 방조한 한명회도 탄핵해야 한다고 성토하였다.

사헌부 대간들이 논의된 내용을 임사홍에게 보고하였다. 임사홍은 격해져 있는 젊은 대간들을 보며 생각했다.

‘한명회를 직접 탄핵하는 일은 원상제 폐지를 거론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임사홍은 사헌부 대간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본부가 상당군을 직접 공격하면 상당군은 반드시 사직한다고 반격할 것이네. 상당군은 주상전하의 장인이시니, 대왕대비도 어쩌지 못하는 처지 아닌가.”

사헌부 젊은 관리들은 임사홍의 말에 곧바로 반발했다.

“공의 기개로도 한명회는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인가요?”

임사홍은 후배들의 도발적인 말에 멈칫했다. 이 일은 그동안 쌓아온 명성에 관계되는 문제임을 자각했다.

‘이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지, 절대로 내가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


임사홍은 대사헌에게 결정을 미루었다.

“자네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네. 다만 이 일은 중요하니 대사헌의 허락이 있어야 할 것이야.”

임사홍과 대관들은 함께 대사헌을 찾아 사헌부의 의견을 보고했다. 권감은 예상대로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본부가 한명회를 탄핵하여 또다시 사직 소동이 일어나면 모두 사헌부를 떠날 각오를 해야 하네.”

임사홍은 물러나오며 후배들을 달래었다. 사헌부 대간들은 대사헌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으나, 의견이 모아지지 않으니 섣불리 고하지 못하고 김순성의 일을 덮어두었다.


3개월 후에 조정은 아내의 병을 핑계로 평창에 부임하지 않은 김순성을 평양 서윤(庶尹)으로 임명하였다.

평양 서윤은 종 4품으로 종 2품인 평양 부윤 겸 평안감사를 도와 평양부의 실무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평안감사와 전라감사, 함경감사는 평양 부윤, 전주부윤, 함흥 부윤을 겸임하여 이들 부에는 실무를 관장하는 종 4품의 서윤(庶尹)을 두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김순성의 인사(人事)에 분노했다.

"김순성은 전에 평창 군수로 제수하였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법으로 마땅히 6년 동안 다시 임용하지 않아야 하는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임용하였습니다. 이조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할 수 있습니까?”

“평창 군수 대신에 평양 서윤이라니요? 거친 조밥은 싫다고 물리치고 하얀 쌀밥을 받아먹겠다는 것 아닙니까?”

“뒷날 수령들이 험지라고 자리를 회피하는 자는 반드시 김순성을 예(例)를 삼을 것입니다. 이 명령은 도로 거두어야 합니다.”


사헌부의 젊은 대관들은 한명회를 원망했다.

“김순성을 잡으려면 반드시 상당군을 탄핵해서 죄를 물어야 합니다.”

사헌부 장령 이맹현과 지평 채수 등 대관들이 임사홍을 찾아 의견을 전하니 임사홍은 다시 대사헌에게 결정을 넘겼다. 한명회를 공격하다가 잘못되면 자신은 물론 아버지까지도 해를 당할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중요하니 대사헌에게 먼저 보고를 드리세.”


임사홍과 대관들은 함께 대사헌을 찾았다. 권감은 이번에도 고개를 크게 저었다.

“감히 누가 임금의 장인을 처벌하라고 할 수 있겠나?”

젊은 관리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사헌부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 일을 이대로 그냥 덮어둘 수 없습니다!”


대사헌은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은 채 경고하였다.

“그런다고 주상과 대왕대비가 상당군에게 죄를 물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생각을 제대로 하고 행동을 해야 하네.”

권감은 사헌부 대관들을 나무라며 모두 물러가게 하였다.

장령 이맹현은 물러나면서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할 수 없다면, 혼자라도 이 문제를 아뢰어야 할 것이야. 마침 내일 주상께 사헌부 업무보고를 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다음날, 이맹현은 작심한 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김순성은 궁벽한 곳을 피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법으로 마땅히 6년 동안 다시 임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디 평양 서윤 임명을 거두어 주소서.”

"과인이 정승에게 이미 들었다. 김순성은 아내가 중병이 있어, 즉시 부임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맹현은 임금의 변명에 꼿꼿하게 반박하였다.

"전하께서 아내가 중병이 있어 즉시 부임하지 못하는 김순성의 사정을 정승에게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부모의 병환이라면 이유가 되겠지만, 김순성은 아내의 병을 칭탁하고 아들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하여 전하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비록 6년 동안 다시 임용하지 않더라도 그 죄를 다스리기에 부족합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용서하고 다시 평양 서윤에 임명하시니,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맹현은 한명회의 잘못도 지적했다.

“만약 일이 국가 대사에 관계되면 정승이 아뢰는 것은 마땅합니다. 하지만 조정 관리 아내의 병과 같은 소소한 일을 정승이 아뢰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신은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과인이 물어서 정승이 대답한 것이다. 이를 그릇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맹현은 거듭 아뢰었다.

“공적인 일이면 정승뿐만 아니라 직위가 낮은 관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순성은 평창군이 만족스럽지 않다 하여 정승에게 청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정승도 그 청을 듣고 상달하여 또한 그릇되었습니다. 청컨대 김순성과 아울러 정승에게도 죄를 물으소서.”

임금은 이미 안색이 변해있는 대왕대비를 의식하며,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과인이 정승에게 물은 까닭으로 정승이 대답한 것뿐이다. 그대는 김순성이 정승에게 청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이 아닌 것을 근거로 거듭 말한다면 큰일이 생길 것이다.”


사헌부 장령 이맹현이 한명회를 겨냥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임금에게 아뢴 소식은 곧 조정에 퍼졌고, 조정 관리들을 술렁이게 하였다. 그날 임원준은 임사홍을 본가로 불렀다.

“내가 듣기에, 사헌부가 상당군을 지목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청했다 하더구나. 그것이 사실이냐?”

“사헌부 젊은 관리들이 김순성을 평양 서윤으로 발령시킨 상당군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대사헌이나 저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의 공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상당군은 3대에 걸친 공신이며 조정에서 산과 같은 존재이다. 더구나 주상과 대왕대비가 상당군을 위해 나섰다면 일단 탄핵을 멈추고 돌아가는 형편을 살펴야 할 것이다.”


임사홍도 아버지의 말에 동조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대왕대비와 주상도 훈구대신의 우두머리인 상당군의 죄를 물어 조정 대신들을 모두 불안하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거나 상당군은 왕후의 아버지이며, 임금의 장인이 아닙니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한명회는 세조 때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 일등, 예종 때 남이의 역모사건으로 익대공신 일등, 성종 때 태평시대를 열었다는 이유로 좌리공신 일등으로 3대에 걸쳐 공신이 되었다.


임원준은 아들의 말에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상당군은 바위이고 사헌부는 계란이라고 비유했느냐?”

임사홍이 주춤하여 바로 대답을 못하자, 임원준은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런 관계가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권불 10년이다. 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평생 가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언관으로서 상당군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가 오기까지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지난번에 정승들을 공격하여 명성을 얻었듯이, 조정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려면, 거물과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말씀대로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상당군을 건드리면 반드시 보복이 따를 것입니다.”


임원준은 아들의 말에 한 손으로 수염을 잡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보복이라, 보복을 한다......”

임원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들을 보며 말했다.

“상당군을 직접 거론하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말을 지금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지혜다.”


임사홍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말을 곰곰이 돌이켜 보았다.

‘상당군을 거론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는 사헌부가 일단 탄핵을 멈추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나, 임사홍은 젊은 대간들의 분노를 앞장서서 달랠 생각은 없었다. 한명회가 권세만 믿고 무리한 인사를 했으니 이번 기회에 거세게 탄핵하여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그들의 말을 가로막고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그동안 쌓아둔 나에 대한 평가가 있지 않은가. 이를 어찌 흔들리게 할 수 있겠는가.’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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