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은 조선 왕의 계보에 새로운 왕을 추가하는 문제로 들썩였다
어린 임금은 즉위한 지 6년이 지나, 어언 열아홉 살 청년이 되었다. 성종은 즉위할 때부터 적통(嫡統)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였다. 성종은 승계법상 양자로서 예종의 뒤를 이은 국왕이 되어 예종을 아버지로,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큰아버지로 모시게 되어 생부의 조카가 된 셈이었다.
의경세자는 성종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성종은 생부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다. 성종으로서는 친부인 의경세자를 동생인 예종의 신하로 두기가 민망했다. 정희대비도 의경세자를 조선 왕조의 계보에 임금으로 만들어 성종의 적통을 튼튼히 하고자 했다.
“의경세자는 예종의 형이었으니, 형이 동생의 위에 모신들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성종은 의경세자를 회간왕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예종의 묘 앞에 부묘(祔廟, 신주를 종묘에 모심)하겠다는 생각을 조정에 알려 의견을 물었다. 조정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으로 술렁거렸다.
김종직의 제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김흔과 김심 형제가 육조거리에서 김맹성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김심이 김맹성에게 물었다.
“주상이 회간왕을 종묘에 모시는 것은 효심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도리(道理)에 맞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회간왕을 종묘에 모시는 것은 세조, 예종, 주상으로 이어지는 조선 왕의 계보에 새로운 임금을 등극시키는 일이네. 이렇게 되면 일찍 세상을 떠난 의경세자가 군주가 되고, 예종은 의경세자의 신하가 되는 것이야.”
김흔은 김맹성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
”이것은 아무래도 명분과 도리(道理)에 맞지 않는 일이니, 함양에 계신 스승님이 아시면 기겁하실 것입니다.”
조정 대신들과 대간들은 대체로 불가(不可)하다고 의견을 모아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정희대비는 이 문제를 다시 의논할 것을 지시하였다.
“전례(前例)가 없다고 말하지만, 회간왕은 본래 형이었으니 종묘에 동생인 예종의 위에 모신들 어찌 예법에 어긋난다고 하겠는가?”
회간왕이 된 의경세자의 부묘 문제는 재논의에 들어갔으나 대간들은 물론 대신들의 불가(不可)하다는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성종은 친부를 위한 일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답답하였다.
1475년 성종 6년 6월, 성종은 임사홍을 승지로 발탁하였다. 임사홍은 승지가 된 후 임금의 생각과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살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좋게 여기는 인물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인물도 알아냈다. 임사홍은 임금의 마음을 헤아렸다.
‘주상에게 힘을 실어주려면 누군가가 먼저 나서야 한다.’
임사홍은 승지들에게 임금의 심기를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해 승지들이 나서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임사홍은 승지들과 함께 임금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회간왕을 종묘에 모시는 일은 매우 마땅한 일입니다. 이제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니 어찌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은 승지들의 지지에 힘을 얻어 대신들을 불러 다시 의논하였다. 의견이 팽팽하게 나누어졌으나 성종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예조는 회간왕 부묘의 절차를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라!”
직제학 홍귀달은 임금의 명에 반발하며 아뢰었다.
"회간왕을 종묘에 모시는 일은 가부(可否)가 서로 나뉘어 국론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신하들과 대간들이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시고 쉽게 정하는 것은 심히 불가합니다.”
"의논이 한결같지 않은 까닭으로 다시 의논하게 했는데, 처음 의논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정의 의견을 충분히 살피고 참작하여 과인이 결정한 것이다.”
대간들도 부묘의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성종은 단호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와서 그만둘 수 없다.”
김종직은 함양에서 홍귀달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서신을 펼치니, 첫 구절부터 심상치 않은 내용이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없는 상황에서 의기(意氣)가 서로 통하는 벗에게 응어리진 내 마음을 풀려고 하오.”
홍귀달은 주상의 친부를 종묘에 모시는 일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격렬하게 논쟁하였던 일을 털어놓았다.
“어전에서 주상이 납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임원준이 나를 보고 부묘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 시비(是非)가 분명한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시느냐고 내가 답하자, 임원준이 그렇다면 부묘할 수 없는 것은 명확하다고 하였소. 그런데 주상 앞에서 이 일을 의논할 때, 주상의 생각을 듣고는 임원준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을뿐더러, 내가 극력 반대하니, 성을 발끈 내며 주상이 보는 앞에서 나를 공격까지 하더이다. 간사한 임원준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으나 참았소. 함께 의논한 신하들은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임원준과 임사홍 두 부자가 나서서 주상에게 아부하며 옳다고 하여 결국 관철되고 말았다오.”
김종직은 홍귀달의 분한 마음이 가슴에 와닿았다. 임금이 친부에 대한 사사로운 정으로 명백히 명분과 대의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고 하면 극력 말려야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닌가. 김종직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군신의 위계가 또 한 번 무너졌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왕의 뜻에 맞추려고 아첨하는 신하가 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이런 상황이 어디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도연명의 시, 술주(述酒)에서 비판한 내용과 유사하다!’
김종직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임금과 대왕대비에게 아첨하여 군신의 도리를 어긋나게 한 임원준과 임사홍 부자는 도연명의 시에 등장하는 유유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으라고 아첨한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김종직은 눈을 감았다.
‘조정에 여전히 간신들이 들끓는구나. 간신들이 세조를 충동질하여 어린 왕으로부터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게 하고 또 어린 왕을 죽게까지 했는데,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간신들이 설쳐 또다시 새로운 왕을 만들어내는구나.’
김종직은 문득 세조가 어린 왕을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될 때 분노하여 써두었던 시가 생각이 났다.
‘벌써 20년이 되었다!’
김종직은 편지나 서류를 보관하는 문갑 안쪽에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오래되어 낡은 보따리 하나를 찾아 꺼내었다. 보따리를 푸니 곱게 접어 보관한 글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이고 하나는 ‘술주에 답하다(和述酒)'였다.
조의제문은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의 의제에 비유하여 조카를 죽인 세조를 은유적 기법으로 비난한 글이었다. 술주에 답하다는 중국 동진(東晋) 공제의 양위로 왕위에 오른 유유(劉裕)의 왕위 찬탈 사건을 은유적 기법으로 비난한 도연명의 술주(述酒)라는 시에 김종직이 답하는 형식으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시였다.
김종직은 젊은 시절에 쓴 '술주에 답하다'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읽어보았다.
'요순(堯舜)의 훈훈함을 높이 끌어내었건만
선위(禪位)를 받은 것은 끝내는 역적이었네.
사관은 문장을 교묘하게 꾸며서
네 가지 신령한 동물이 나타났다고 속였다네.
거짓으로 하늘의 명을 만들 수는 있어도
세상은 이미 어지러운데 어찌할 것인가.'
김종직은 어린 왕이 숙부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었던 시를 읽으며 감회에 젖었다.
‘당시에는 간신들이 세조를 움직여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간신들이 없던 왕을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구나.’
김종직은 유생 시절 쓴 ‘술주에 답하다’를 읽으니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듯 가슴이 뛰었다. 이번 일에 대한 생각을 후세에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김종직은 흰 종이를 꺼내고 먹을 갈았다. 등잔불의 심지를 낮추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연명이 은밀한 말을 즐겨 쓴 것은 유유가 한창 사납게 날뛰고 있으니, 글을 남기더라도 멸족의 화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종직은 조용히 먹물을 벼루의 묵지(墨池 :먹물을 모으도록 된 오목한 곳)에 모았다.
“관직에 있는 나도 역시 두렵다. 하지만, 후세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내가 남긴 글을 보고 역사의 기록을 두려워하게 만든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김종직은 붓을 들어 유생 시절 자신이 쓴 ‘술주에 답하다(和述酒)’에 추가하여 불충한 신하를 나무라는 구절을 보태었다.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사람이 어찌 스스로 듣지 못하고 행하는가.
임금과 신하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간신들의 이름은 후손이 끊어져 멸족하여 버렸네.
‘술주’에는 숨어 있는 말이 많으니
도연명은 출중하여 비교할 자가 없구나.'
김종직은 악명(惡名)을 남긴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자식까지 죽게 하는 하늘의 벌이 내렸다는 역사적 경고의 사례를 덧붙여 ‘술주에 답하다’라는 시를 연작으로 만들었다. 김종직은 종이 한 장을 더 꺼내어 별도로 시(詩)의 서문을 썼다.
“후세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들이 나의 시를 보고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된다면 삼가 춘추의 필법을 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종직은 시의 서문에 역사적 사실(史實)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명분과 의리를 드러내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들을 징계하여 후세에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김종직은 종이에 쓴 글이 마르기를 기다리다, 유생 시절에 쓴 조의제문을 다시 읽어보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두 글을 보고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충성스러운 분노와 울분으로 준엄한 역사의 기록을 남겼다고 평가를 할까? 아니면 그러면서 그 시대에 벼슬을 한 것을 가소로워할까......?'
김종직은 밤새 탄식을 그칠 수가 없었다.
첫닭이 울어 새벽을 알렸다. 김종직은 밤새 자리에 눕지 않았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언뜻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잠이 들었는데, 관아의 심부름하는 아이가 이방이 아뢸 것이 있어 찾는다고 깨웠다.
김종직은 방에 펼쳐두었던 글을 곱게 접어서 문갑 안쪽에 깊숙이 갈무리했다.
이날 김종직이 문갑 속 보따리에 은밀히 보관한 ‘술주에 답하다’의 글은 유생 시절 쓴 ‘조의제문’과 함께 이 땅에 수많은 젊은 선비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
(일러스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