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의 제자들 중에서 훗날 문묘에 배향되는 선비는 정여창과 김굉필이다
김종직의 제자들 중에서 훗날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선비는 정여창과 김굉필이다. 문묘(文廟)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유교의 성현을 받드는 사당을 말한다.
김굉필(金宏弼)은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무인 기질을 닮아 호방한 성격이었다.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는 거칠 것 없는 개구쟁이로 자랐다. 어려서부터 호기로워 책보다는 골목대장으로 저잣거리를 누비며 무례한 동네 망나니들을 보면 채찍을 휘두르며 혼을 내어 동네를 평정하였다.
이런 김굉필의 거친 행동은 엄격한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서서히 바로잡혀 갔다. 어머니는 김굉필에게 새벽마다 문안을 시키며, 전날 아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엄한 얼굴빛으로 훈계하였다. 김굉필은 어머니의 훈육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나 제대로 지도를 받지 못해 글의 이치는 깨닫지 못했다.
김굉필은 19세가 되던 해에 장가를 들었다. 장가를 든다는 것은 장가(丈家), 즉 장인의 집에 들어가서 산다는 뜻으로, 김굉필은 신부 댁 앞마당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처가인 합천으로 옮겼다. 김굉필은 합천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지어놓고 학문에 몰두했다. 책을 읽을수록 글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는데 장애가 많았다. 김굉필은 의문이 생길 때마다 주변에 제대로 가르치며 지도해 줄 사람이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합천의 한훤당에 밀양에 사는 벗인 곽승화가 찾아왔다. 곽승화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고조할아버지였다. 김굉필이 반갑게 맞으니 곽승화가 물었다.
“함양의 군수가 문장과 학문이 높은데, 자네도 그 소문을 들어보았는가?”
“화향은 백리((花香百里)이고 인향은 만리(人香萬里)라고, 그분의 소문은 익히 들었네. 도학을 정통으로 배우신 분이라 하였네.”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지금 함양으로 가는 길인데, 함께 가서 그분한테 배우지 않겠는가?”
김굉필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망설임 없이 곽승화를 따라 길을 나섰다.
두 사람은 함양에 도착하자마자 김종직에게 예를 갖추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하였다. 김종직은 두 사람의 기품이 있는 몸가짐과 어질게 보이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궁벽한 땅에서 이런 선비들을 만나니 무슨 행운인가.”
김종직은 《소학》의 중요성을 새로 맞은 제자들에게도 강조하였다. 김굉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소학》은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책이 아닙니까?”
“어린 시절부터 배워 아는 것을 성인이 되어도 실제로 행하지 않는다면 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네.”
김종직은《소학》이 성리학 공부의 요체라고 강조하였다.
“학문을 하는 목적은 성인(聖人)의 삶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네. 성현의 훌륭한 인품도《소학》을 통해 얻을 수 있네.”
김굉필은 학문의 출발점이 어린아이의 학습서인 《소학》에 있다는 스승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이후로 김굉필은 스승의 당부를 명심하고 《소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어린 시절 읽었던 《소학》을 다시 꺼내어 훑어가며 읽어보니, 그 깊이의 오묘함에 무릎을 칠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성현이 바라본 우주가 있었고, 삶이 있었다. 또한 도덕이 있었고, 역사가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세상의 이치가 모두 이 책 안에 들어있구나.’
김굉필은 책을 내려놓고, 감격하여 붓을 들었다.
‘글공부를 업으로 삼고도 하늘의 이치 몰랐는데
《소학》의 글에서 지난 잘못 깨달았네.
이것을 쫓아 정성껏 자식 도리 다하리니
구차하게 부귀영화 어찌 부러워하랴.'
김굉필은 스승의 지도를 받은 대로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그는 남들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하였기에 더 열심히 공부하였다. 매일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김굉필에게 나랏일을 물으면 ‘소학 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습니까’하며 겸손하게 답했다. 김굉필은 학문의 심오한 이치를 나날이 깨달으니 글공부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글을 읽고 깨쳐서 성인(聖人)의 삶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는 듯하다.'
학문에 맛을 들일수록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과거 공부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깝고 부질없어 보였다. 과거 공부는 문장을 잘 짓는데 힘을 기울이고, 예전 과거에서 합격한 글을 구해 모방하여 글을 지으니 학문의 깊이를 알아가며 느끼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종직은 김굉필의 사람됨과 학문하는 자세를 칭찬하였다.
"김굉필을 보면 성인(聖人)이 될 사람의 바탕을 보는 듯하다. 허형(許衡)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난듯하구나.”
허형은 주자학을 원나라의 정치이념으로 삼게 만든 중국의 대학자였다. 허형은 《소학》을 중요하게 여겨 임금이 요순이 되고 백성을 덕스럽게 하는 것의 기본이 《소학》에 있다고 했다. 김종직이 제자 김굉필을 자신이 존경하는 허형에 빗대었으니 최고의 칭찬인 셈이었다.
김굉필은 스승이 예언한 대로 훗날 사림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조정은 그가 동방 성리학의 학문을 이어받아 도학의 참뜻을 실천하고, 조광조 등 많은 제자를 길러 도학을 전파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문묘에도 모셨다.
김굉필이 죽은 지 15년 후인 중종 12년 8월, 경연에서 임금이 물었다.
“어제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를 보니,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文廟)에 모시자는 것이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연관 기준(奇遵)이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도학이 밝지 못하여 사람의 마음 또한 밝지 못하였는데 고려 말에 정몽주가 성리학을 조금 열어 놓았습니다. 김굉필이 젊어서 정몽주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종직에게서 배워 도학의 실마리를 깨치고 정도(正道)를 닦은 공은 지극히 큽니다. 그 뒤로 사림이 그를 사모하여 본받았으니 후학(後學)에게 미친 영향이 지극합니다. 그러니 문묘에 모시는 일은 단연코 망설일 것이 없습니다.”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