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의 주둥이가 부서져 반쪽자리 인생이 된 것도 서러웠는데 이제 정말 버려질 것 같아 무섭습니다.
저는 유명 커피전문점에서 이 집으로 온 지 채 6개월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는 반짝반짝 새 옷 입고 커피전문점 진열장 제일 앞 열에서 최고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듯했지만 맵씨나 스타일에서 훨씬 뒤처지는 다른 텀블러들을 제치고 당당히 선택받아 기분 좋게 이 집으로 왔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손에 폭 감싸지는 그립감이 최고입니다. 쉽게 부식되지 않는 강철 합금의 스테인리스로 속도 꽉 채웠습니다. 겉옷은 내열성이 강한 폴리프로필렌으로 중무장했고요. 황금빛 뚜껑에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커피전문점의 상표를 떡하니 타투하고 있어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차가운 냉기와 따뜻한 온기를 동시에 꽉 잡아주는 끝내주는 재주까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멋진 저였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주인은 저를 깨끗하게 목욕시켜 줬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안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연마제를 기름으로 닦아내고 다시 뜨끈한 물에 베이킹소다 입욕제를 넣어 반신욕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해피앤딩이었습니다.
참, 세상 말 하나도 그른 말 없습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해 줄 주인을 만나야 행복하다더니 말입니다.
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아직 모든 관절이 부드럽지 못했습니다. 태어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왔으니 더 많이 긴장한 탓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집 남자아이는 제 사정에는 1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의 뻑뻑한 뚜껑을 열고 닫을 때마다 잘 안 된다며 짜증을 냈습니다. 사용할 때마다 투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습니다. 저라고 그러고 싶었나요. 뭐든 잘한다. 잘한다 칭찬해 줘야 저도 힘이나 좀 빠르게 부드러워졌을텐데 항상 투정만 하니 온몸이 더 뻣뻣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으로 데리고 온 주인아주머니가 대부분 사용하셨는데 그날은 깜빡하고 아들 텀블러를 잊고 온 날이었습니다. 일이 생기려고 하면 꼭 이렇습니다. 깜빡하거나, 잊어버렸거나 말입니다. 목이 마르다는 아들에게 한치의 주저도 없이 저를 쑥 내밀었습니다. 요즘 제법 손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어 제가 손안에 폭 감싸지더라고요. 한 번에 힘차게 뚜껑을 열었습니다. 이런 힘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너무 세게 열다 뚜껑 주둥이가 망가졌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아프기는 또 얼마나 아팠게요. 더 큰 문제는 이제부터 뚜껑이 닫히지 않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맞춤 제작한 듯 뚜껑을 닫을 때 똑떨어지게 잘 맞았는데 이제 헐렁헐렁 헐랭이가 됐습니다. 이 말은 내용물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헤벌쭉 벌어진 입에서 침 흐르듯 똑같은 신세가 됐다는 소리입니다. 저의 쓸모가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행입니다. 아주머니가 생각보다 알뜰합니다. 곧 쓰레기가 될 줄 알았는데 저를 버리지 않고 집에서만 사용합니다. 정말 그 이후로 밖에 나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러니 이날도 전혀 외출 계획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아주머니가 따뜻한 커피를 제 속에 담을 때까지도요.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저를 꺼내 커피를 탔습니다. 오늘따라 저도 따뜻하고 향긋한 커피 냄새에 흠뻑 취해 느긋한 아침을 맞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저를 아주머니 입으로 가져가 커피를 마실 찰나 잠에서 깬 아들 덕에 산통 다 깨졌습니다. 정말 입술이 닿지도 않았습니다.
저만 덩그러니 식탁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품고 다시 돌아올 아주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곧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근데 사십 여분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아주머니는 애타게 기다린 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분주했습니다. 외출계획이 있다더니 시간이 촉박한가 봅니다. 아들 아침을 챙겨 먹이고, 청소기도 돌리고, 빨래도 삶아 세탁기도 돌리고, 설거지까지 순식간에 완벽하게 마무리했습니다. 그 뒤 서둘러 이것저것 짐을 챙겨 나가던 아주머니가 다시 돌아와 식탁 위 저를 손에 쥐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아... 왜 이러세요. 저는 나가기 싫은데요. 저 대인공포증 있어요. 다들 고장 난 제 뚜껑만 쳐다본다니깐요. 뚜껑 틈으로 커피가 쏟아질까 무섭고 부끄러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도서관입니다. 예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오던 곳인데 정말 오랜만입니다. 도서관에 행사가 있나 봅니다. 빼꼭한 책 숲 중앙 무대에 독서텐트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속으로 아주머니와 아들이 쏙 들어갔습니다. 저도 함께요.
바닥이 카펫입니다. 이런 자리는 정말 불편합니다. 제 안에 커피가 쏟아질까 노심초사하며 긴장해야 하거든요. 텐트 안이 생각보다 아늑했습니다. 커피 덕인지 텐트 덕인지 마음도 따뜻해졌습니다. 그러니 걱정도 입 안에서 솜사탕이 '사르르' 녹듯 사라졌습니다. 눈도 절로 감겼습니다.
점점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빠져들 때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손 쓸 틈도 없었습니다. 빈백에 기대 누운 두 사람이 책을 읽다 갑자기 자리싸움을 했습니다. 아들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아주머니가 한껏 분위기에 취해 있는 저를 손으로 '툭'쳤습니다. 정말 트위스터 추는 듯하며 쓰러졌습니다. 제 입에서 걱정하던 커피가 '콸콸' 쏟아졌습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저만큼 아주머니도 놀랐나 봅니다. 얼른 저를 발딱 세웠습니다. 에코백의 휴지를 찾아 카펫에 커피가 스며들기 전에 닦아 냈습니다. 더 이상 묻어나지 않을 때까지 닦고 닦아 냈습니다.
저는 울고 싶었습니다. 정말 안 오고 싶었습니다. 잠깐 안락함에 취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미웠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아주머니를 보니 미안해졌습니다. 괜히 따라왔다 이게 뭔 일입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냥 집에서 물컵이던 커피컵이던 사용해주는 대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