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67번.
알베르 까뮈의 작품입니다. '오랑'이라는 해변가 작은 도시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희망을 갖고 페스트와 싸워나갑니다. 폐쇄된 도시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페스트를 전염시킬 수도 있는 시민들의 상황은, '모든 이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보편적 폭력의 상황'을 상징해줍니다. 페스트를 '전쟁'으로 비유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 베르나르 리유의 시선 >> - 오랑시의 의사입니다. 피를 토하며 죽은 쥐들이 대량으로 발견될 무렵, 지병이 있던 아내를 다른 도시로 요양보냅니다. 그러나 도시가 페스트 선포로 봉쇄되자 아내와 연락이 두절됩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보건대를 조직해 방역에 힘쓰며 각자의 방식으로 페스트와 맞서던 중 함께 활동했던 친구가 감염되어 죽고 맙니다. 도시의 봉쇄가 풀릴 무렵 아내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게 되고, 페스트와 싸운 시간들을 연대기로 기록해나갑니다.
*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 리유는 머리를 흠칫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 시의 문을 폐쇄함으로써 생긴 아주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당한 사람들이 맞이할 돌발적인 이별이었다.
* 우리들 각자는 그날그날 하늘만 마주 보며 고독하게 살아가기를 감수해야만 했다.
* 제5주에는 321명, 제6주에는 345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적어도 그 증가율은 사태를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 시민들은 그 불안의 한복판에서도, 그것은 필시 가슴 아픈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결국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버리지 못했다.
* 페스트가 더욱 성해져서 일주일에 사망 환자 수가 평균 오백 명에 달하고 있는 병원에서 보낸 그날들이 정말로 추상적이었을까? 그렇다. 불행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 적막한 대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어버린 육중한 입방체들을 모아 놓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고, 단지 그 사이에서 잊힌 자선가들이나 영원히 청동 속에 갇혀 질식해 버린 그 옛날 위인들의 흉상만이 돌이나 쇠로 만든 그 인공의 얼굴을 통해, 한때는 인간이었던 것들의 몰락한 영상을 상기시키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 그 병원에는 관이 다섯 개가 있었다. 그것이 다 차면 구급차가 싣고 간다. 묘지에 가면 관을 비우고, 무쇳빛 시신들은 들것에 실려서 이런 용도에 쓰려고 지은 헛간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관들은 소독액이 뿌려져서 다시 병원으로 운반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필요한 횟수만큼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 누적한 희생자들의 수는 이 시의 조그만 묘지가 제공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 시신들은 서둘러서 구덩이 속에 내던져졌다. 아직 완전히 구덩이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삽에 퍼 담긴 석회가 시체의 얼굴을 짓이겼고, 이어서 이제는 더욱더 깊게 파인 구덩이 속에, 이름 없는 흙이 그 위를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다.
* 페스트는 고독하면서도 고독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공범자로 삼는다.
* 코타르와 타루는, 당시 삶 자체의 이미지인 그 광경들을 눈앞에서 보면서 그저 외로이 서 있었다. 무대 위에는 전신의 관절들이 풀려 버린 광대의 모습으로 분장한 페스트, 그리고 관람석에는 붉은 의자 덮개 위에 잊어버린 채 놓고 간 부채며 질질 늘어진 레이스 세공품들의 모습으로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 사치, 그것이 바로 그들 삶의 이미지였다.
* 어떤 사람을 정말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어느 순간에도 결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살림 걱정도 안 하고, 날아다니는 파리도 안 보이고, 밥도 안 먹고, 가려움도 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라든가 가려움이라든가 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 눈물이 앞을 가려 리유는 타루가 갑자기 벽 쪽으로 돌아누워 마치 몸 한구석에서 가장 근원적인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기나 한 것처럼 힘없는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두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님을, 적어도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그는 언제나 침묵 속에서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 마찬가지로 , 그는 타루의 바로 곁에서 살아왔는데도, 자신들의 우정을 정말 우정답게 체험할 시간도 미처 갖지 못한 채 그날 저녁에 타루는 죽어 갔던 것이다. (···)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 코타르도, 타루도, 그리고 리유가 사랑했으나 잃고 만 남자들과 여자들도, 사자(死者)들도, 범죄자들도 모두 잊혔다.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리유는 모든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장 타루의 시선 >> - 오랑에 몇 달동안 묵고 있는 여행자로 리유와 친구가 됩니다. 여행지인 도시에 페스트가 심해지자 보건대를 만들어 활동하지만, 페스트가 거의 사그라들어갈 무렵 감염되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 페스트는 고독하면서도 고독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공범자로 삼는다. (···) 그 병이 두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머리가 조금 아프기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되고 새파랗게 질리는 버릇, 그리고 초조해하고 예민한, 요컨대 불안정한 감수성, 망각을 죄로 변형하고 바지 단추 하나만 잃어버려도 안절부절못하는 그들의 감수성, 이 모든 것의 공범자인 것이다.
*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해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어요?
<페이지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