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르잔 누르고진 <summer rain>
주변의 모든 배경이 사라질 만큼 행복한 너와 나만 남았습니다.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에 마음까지 무장해제 되어 버리네요.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처리해야 할 일들도, 성가시게 만드는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오롯이 즐거운 우리만 있습니다. 비는 거리를 놀이터로 만들었고 쏟아지는 물줄기는 장난감이 됐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보이네요. 아이들 얼굴에는 즐거움이 한가득입니다. 어떤 것도 이 순간을 망칠 수 없을 겁니다. 아이들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데에는 쏟아지는 비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어릴 적, 하늘이 열린 것처럼 비가 쏟아붓던 날이 있었어요. 그 빗소리가 "친구야, 놀자!"로 들렸던 나는 그 길로 밖으로 뛰어나갔지요. 갑작스러운 비로 동네 곳곳엔 물웅덩이가 생겼어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참방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비 하나로 세상은 환희와 재미로 가득한 곳이 되었었죠. 그러니 이 그림은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 웃음이 나의 얼굴에도 머물렀던 때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기억 언저리를 더듬어야 만져지는 그 얼굴은 아련한 추억 속에 있습니다. 이제는 비가 내려도 마음이 덤덤한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머릿속에서는 생생한데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그 얼굴 때문에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집니다.
그림 속 아이들을 보면서 물러가는 여름을 처음으로 아쉬워했습니다. 두근거리는 삶의 순간을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비를 맞으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를 줄 몰랐습니다. 삶은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감격을 던져주기도 하나 봅니다.
사는 게 참 이상하죠. 어렸을 때 설레던 모든 일들이 어른이 되면 그저 그런 게 되어버리니까요. 비도 눈도 그러려니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좀 귀찮을 때도 있죠. 그렇게 무채색의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세상은 참 별 볼 일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루를 꾸려가는 것도 바쁜데, 비가 내린다고 감동까지 할 여유가 없기도 하죠. 그래도 뭔가 씁쓸하고, 쓸쓸합니다. 내리는 비에 눈길 한 번, 마음 한 번 주지 못하고 살고 싶지는 않나 봐요.
어른의 삶이 마주하는 반복적인 일상은 종종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것들은 쉽게 지나치게 됩니다. 그저 그런 일상을 전복시킬 특별하고 놀랄만한 소식을 기다리고 기대하지만, 그런 것들은 늘 잠시뿐이죠. 결국 우리는 평범한 날들 속에서 일상과 어울리며, 괜찮은 보통의 날들을 살아야 합니다. 무료하고 때때로 권태로운 일상이 우리의 무대입니다. 그 무대를 어떻게 꾸밀지는 나의 손에 달려 있겠죠.
비만 내려도 다채로울 수 있는 세상을 산다는 건 분명 감격스러운 일일 겁니다. 쏟아지는 비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에서 빛나는 감격을 목도합니다. 반짝이는 삶을 살고 싶지만, 반짝임은 늘 작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나 봅니다. 작고 자연스러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웃음을 얻으며 행복해하고 싶습니다. 거창한 날은 아니더라도 감격스러운 날은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일상을 대하는 마음을 배웁니다. 저 아이들은 비가 내려서 기뻤던 것처럼, 해가 뜨거우면 찬란할 겁니다. 눈이 내리면 신날 테고, 바람이 불면 자유롭겠죠. 매일의 삶에서 감격을 발견하며, 다른 색깔의 하루하루를 만날 겁니다. 삶은 모두에게 같은 것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삶에게 다르게 반응합니다. 괜찮은 삶을 살려고 애쓰는 동안 내가 놓친 숱한 감격들을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일상은 우리에게 매일 감격의 초대장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고문자처럼 늘 넘겨 버리던 그 초대장을 오늘은 열어 보고 싶어 집니다. 소풍날 보물찾기 하듯, 늘 마주하는 평범한 것들에서 감격이라는 설레는 일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거창할 이유는 없으니, 매일 신는 양말에서 시작해 보면 좋을 것 같네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꺼내 들었던 양말에 조금 세심한 눈길을 주기로 합니다. 다가오는 가을과 어울리는 노란색이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웃음으로 기분을 돋우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이 여름의 마지막을 눈이 부시게 반짝이며 걸어 봐야겠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노란 양말을 신어서 그렇다고 말할 겁니다. 뭐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주변의 것들이 다 사라질 만큼 행복해할 거니까요.
그래도 누군가와 이 기쁨을 나누면 좋을 것 같으니까, 당신이 나를 발견해 주세요.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날씨에 굳이 발목까지 올라오는 노란 양말을 신고 아이 같은 얼굴로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일 테니까요. 당신의 감격은 내가 발견할게요. 아무것도 아닐 뻔한 서로의 오늘을 알아 봐 주며 의미 있는 눈인사로 우리의 오늘이 반짝였음을 축하해 주자고요!
삶은 끊임없는 사소함으로 우리를 두드립니다. 그 두드림에 반응하는 건 우리의 몫이죠. 작은 것이 부를 때 이제 나는 대답할 겁니다.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이 가져 올 모든 것에 감격해하며 하루를 채워보려 합니다. 이전 보다 더 행복해질 각오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