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야, 나의 소원은

지니가 나타났다.

by 아무

안경을 닦았다.

유난히 지저분해진 안경을 입김까지 불어가며

정성껏 닦았다.


쓱쓱,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온다.

순식간에 뿌연 안개로 가득 차버린 것 같은 방 안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주인님, 무슨 소원을 들어드릴까요?


연기로 가득한 방 안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잘 닦인 안경을 썼다.


지니가 나타났다!

램프를 잘 안 쓰는 사람들 때문에

오래된 박물관에서 몇 백 년간 갇혀있던 지니는

지진으로 박물관이 붕괴되는 바람에 램프 밖을 뛰쳐나와

바람에 떠밀려 대한민국까지 오게 되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지니는 현대인이 가장 많이 닦는 것이

안경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집으로 향하던 나의 안경 속에

새로운 거처를 정한 것이다.

그리고 몇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소원을 말하라니!


두근거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내일부터 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빨래도, 청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우아하게 '지니'하고 부르면 되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잔뜩 먹어도, 운동을 하지 않아도

날씬한 몸매를 가질 것이다.

마트 가서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고민도 하지 않을 거다.

다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대망의 첫 번째 소원을 말할 순간이었다.

무엇을 가장 먼저 말할지 고민이었다.

그 클라이맥스를 위한 배경음악도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지니는 충실하게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내가 말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음악 소리는 점점 커지는데 모두들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의 말이 소리가 되지 못한다.

음악 소리 때문이다.

나는 음악이 울리는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여기저기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헤매었다.

지니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다.

서둘러야 했다. 이러다 지니가 사라질지 몰라.


찾았다!


5시 알람


펑하는 소리와 함께

지니는 사라졌다.


혹시 모를 일이다.

입김을 불어 안경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지니야, 아직 거기 있어?

......

평온하고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날들.

밥을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하고 밥을 조금 덜 먹으려 애쓰고

물가가 오른 것을 걱정하며 장을 본다.


잠시 짜릿했던 꿈을 꾸면서 생각했다.

누군가가 정말로 나에게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 수 있을까?


오늘의 편함과 노력 없는 성과들로

일상을 잃고 후회하는 어리석은 소원을 빌

기회를 놓쳐서 다행이었다.


안경을 닦아도 연기가 나지 않은 평범한 날들은

가끔 지니를 생각나게 하겠지만,

보통의 일상을 지키며 나의 하루를 채워나가는 행복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 18화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좋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