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생후 31일부터 100일까지 입으로 분유를 먹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분유가 기도로 넘어가 흡인성 폐렴이 왔고, 삼킴 기능이 정상이 될 때까지 콧줄로 수유를 해야 했다.
아이는 코부터 위까지 이어주는 관을 24시간 넣고 있어야 했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아이가 자라면서 손가락을 점점 쓸 수 있게 되자,
콧줄을 뽑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순간 콧줄을 쑥 빼버렸다.
그러면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려면 콧줄을 다시 넣어야 했으니까.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응급실로 달려갔던 것 같다.
응급실 접수처에서 매번 아이 환자번호를 읊다 보니, 아이 주민번호보다도 환자번호가 더 익숙해졌다.
응급실에 근무하는 간호사 선생님들, 의사 선생님들, 다른 응급실 직원분들이 모두 아이와 나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기 또 왔구나~"
그렇게 병원을 내 집처럼 오가는 와중에 남편이 자기가 코로나 밀접접촉자가 되었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 가족이 자가키트로 검사를 해보았다.
정작 밀접접촉자인 남편은 음성, 아이와 나는 양성이었다.
아마 병원 진료를 대기하면서 아이가 옮았었나 보다.
아기가 너무 어려서 마스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나 보다.
'어쩐지 너무 힘들더라... 코로나였구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이미 내 체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8번, 3시간 간격으로 아이가 수유할 때였다.
콧줄 수유를 하는 동안은 내가 분유를 넣는 주사기를 내내 손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
한 팔로는 주사기를 들고, 다른 팔로는 분유를 넣고, 품에는 아이를 안고...
졸거나 한눈을 팔 수도 없었다.
분유를 넣는 주사기에 공기가 들어가거나, 너무 빨리 분유가 들어가면 아이가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고 적정 속도록 분유가 들어갈 수 있도록 분유 넣는 속도를 조절해주어야 했다.
수유를 하고 나서는 반드시 30분에서 한 시간은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수유를 끝마쳤다고 바로 아이를 눕혀버리면, 아이가 분수토를 했기 때문이다.
아마 아이가 스스로 조절하며 먹은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직접 분유를 넣어준 것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타공인 순둥이였던 아이는, 생후 31일부터 시작된 3주간의 입원생활과 콧줄수유로 예민보스가 되어버렸고, 입원생활 3주 내내 24시간 붙어있던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원래도 온통 내 차지였던 육아는 그렇게 정말 오롯이 나만의 몫이 되었다.
남편과 같이 낳은 아이가 아니고 나 혼자 만든 나만의 아이 같았다.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채 두 달이 넘어가자 나도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남편은,
본인은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일을 해서 나와 아기를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코로나에 걸리면 안 되기 때문에,
얼른 마스크를 꺼내 썼다.
그리고 혼자 시가에 가려고 했다.
나와 아이를 두고.
진짜 미칠 것 같았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는데, 눈앞의 남편은 전혀 날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엄마아빠에게 SOS를 청했다.
엄마아빠는 흔쾌히 당장 오라고 하셨다.
도와주시겠다고.
코로나 키트를 한 게 아마 밤 11시쯤.
어떻게 대처를 하냐 실랑이를 한 시간쯤 하고,
엄마아빠에게 양해를 구한 게 12시쯤.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된 아기와 함께 움직이려니 짐이 말도 안 되게 많았다.
결국 SUV를 갖고 계신 근처 사는 시아버지께도 도움을 요청했다.
분유포트, 하이체어, 분유, 수유용 주사기, 기저귀, 아기 장난감, 아기 옷, 등등...
시아버지 차에 아기 짐을 싣고, 나와 아기는 남편차를 타고
그렇게 내가 원래 살던 우리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
코로나에 걸린 나와 아기를 그렇게 버려두고
남편은 자기 아빠와 함께 내 곁을 떠났다.
남편은 자기는 코로나에 걸리면 안 되기 때문에^^
퇴근 후에 한 10분, 주말에도 두세 시간만 나와 아기를 보러 온 후 혼자 집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나와 아기가 코로나에서 다 낫고 난 이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나와 아기는 코로나가 나은 이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지 못했다.
내가 도저히 엄마아빠의 도움 없이 지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도대체 혼자서 어떻게 버텼던 건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나는 집에서 엄마, 아빠, 동생, 아기와 함께 지내고
남편은 퇴근 후 잠깐과 주말에만 나와 아기를 보러 왔다.
남편을 잠깐씩 볼 때마다 난 남편에게 애원했다
좀 더 있다 가면 안돼?
오늘 자고 가면 안 돼?
우리랑 같이 있으면 안 돼?
그때, 나는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 너무너무 필요했다.
보통 콧줄수유는 발달이 느린 아기들이 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 아이가 삼킴 말고 다른 곳도 아픈 아이일까 봐 걱정이 되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매일 삼킴에 관해 검색을 하고, 의료진을 찾아보고, 유튜브를 찾아보고...
이런 걱정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아이가 더 아픈 곳이 있으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우리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 다시 복직 못할 수도 있겠다...'
나와 아이의 미래에 대해, 우리 가족의 미래에 대해 같이 고민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의 불안을 달래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늘 핑계를 댔다.
우리 본가에서 출퇴근을 하면 너무 오래 걸려서 안된다.
무슨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돼서 바쁘다. 일을 해야 된다. 미팅이 있다. 등등...
그렇게 그는 내가 그를 가장 간절히 필요로 할 때,
나를 버렸다.
아이가 100일이 되었을 때, 너무나 감사하게도 삼킴 검사를 통과해서 콧줄을 졸업했다.
그 뒤 아이가 입으로 먹는 것에 익숙해질 때까지 난 본가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 집에서 나와 남편의 사이는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그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구나.
양육메이트도 못 되는구나.
우리는 그냥 경제공동체였다.
아이가 콧줄수유했을 때 썼던 용품들이다.
매일 쓰는 소모품들이기 때문에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콧줄수유를 졸업한 뒤엔 기쁜 마음으로 다른 아기에게 나눔 했다.
부디 이 용품을 받아간 아기도 완쾌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