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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리 Jun 07. 2024

조상님이 울려주는 레드라이트

최악의 프러포즈

어쩌면, 내 결혼은 첫 단추부터 잘못됐었다.

그게 바로 탈출 신호였는데, 조상님이 울려주는 경고등이었는데

그걸 무시한 대가를 지금 이렇게 치르는지도 모른다.



결혼의 첫 단추, 즉 프러포즈.

내가 받았던 프러포즈는 정말 최악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악몽 같았던 순간이니까.


원래 나는 원하는 프러포즈가 있었다.

영화 트와일라잇시리즈나 어바웃 타임에 나오는 프러포즈가 바로 내가 꿈꾸던 프러포즈였다.

결혼을 확정하지 않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둘만 있는 공간에서,

진심이 담긴 사랑고백이면 충분했다.

전 남편과 연애할 때도 그 영화들을 같이 보면서 몇 번이나 저런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꽃도, 음악도, 반지도 다 필요 없었다. 그냥 그거면 됐었는데...


일단 나의 결혼준비는 프러포즈 없이 진행되었다.

결혼식장 예약이 끝난 뒤 프러포즈를 받았다.

이미 결혼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내가 꿈꾸던 프러포즈는 그 시기부터 오답이었다.


전남편은 내가 예상 못하는 타이밍에 프러포즈를 한다고 그의 생일에 프러포즈를 했다.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 대신 긴 편지로.

우리 둘만 있는 공간에서가 아닌 야구를 보러 가는 기차 안에서.

내가 원했던 모습과 달라 좀 실망했지만,

그래도 처음엔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받아줬다.

그날 하루는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걸.




전남편은 야구광이기 때문에 그의 생일엔 매년 그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러 야구장을 찾았다.

난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를 만나고 그가 너무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장에 자주 갔었다.

그의 생일선물로 난 야구가 가장 잘 보이는 포수 뒤쪽에 자리를 예매했다.

그 자리는 중계화면에 잡히는 자리였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야구가 시작하고 얼마 뒤,

중계화면에 잡힌 나에게 성희롱이 쏟아졌다.

그때 당시는 스포츠 중계화면에 댓글을 달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스포츠 쪽 댓글 기능이 사라졌다. 정말 축복이다.)

그 댓글로 내 가슴에 대한 천박한 성희롱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


처음엔 몰랐다.

그러다 우연히 내가 화면에 잡힌다는 친구들의 연락을 보고 중계화면을 확인하려고 화면에서

나에게 쏟아지는 역겨운 말들을 볼 수 있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손이 덜덜 떨렸다.

난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도 외투를 껴입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수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가 화면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성희롱은 계속되었다.



나도 안다.

그건 사고였다.

전남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성희롱 증거를 수집하는 걸 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무서워서 덜덜 떠는 나 대신 화를 내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야구경기가 끝난 뒤 언제나처럼 인스타에 야구 경기 보고 온 인증올리고, 대충 의미심장한 말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이 다였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데 옆에서 인스타나 하고 있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그였는데, 그때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에게 프러포즈받은 날, 그와 결혼하는 것이 싫어졌지만,

이미 결혼식장도 확정했고, 결혼준비도 상당 부분 진행됐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미 결혼한다고 말한 후여서 여기서 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바보같이.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모든 SNS에 내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메신저 프로필사진도 설정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내 얼굴을 알게 되는 일에 심한 거부감이 든다.

아마 그 일이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이혼을 하고,

안 하던 것 위주로 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내 사진으로 바꿔두었다.

종종 SNS 업로드도 한다.

사실 예전처럼 즐겁게 SNS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힘들지만, 정면돌파 해보려고 한다.

이건 그를 내 삶에서 지워내는 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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