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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다연 Oct 30. 2022

01) Take your marks!

“Take your marks!”는 수영에서 출발 직전 취하는 자세로, 반드시 부동자세여야만 한다.


수영선수로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

스타트대에 올라서서 총알처럼 튀어나가기 직전의 순간.


큰 쉼호흡 한 번으로 내 몸에 기를 모아 부동자세를 취하면, "Take your marks" 한마디에 가장 큰힘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아마 살아가면서 어떤 힘을 쓰기 전 힘을 모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반드시 존재해야한다.



고등학교 3학년, 전국체전에서 3관왕에 오른 나는 전국체전이 끝나자마자 한 실업팀으로부터 또래 선수들 중 최고 대우를 약속받고, 계약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이후, 어려웠던 집안 형편때문에 고등학교 3년 내내 실업팀만 꿈꾸고 운동했던 나는 꿈이 이루어졌다는 기쁨과 이제 나도 조금이나마 집안에 보탬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좋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약서 사인이후 약 두달이 지났을 시점. 갑자기 계약이 파기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당시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울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난 잘 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난 그냥 뭘 해도 안되는 아이인가?'

머릿속에는 비관적인 생각과 나쁜 생각만 가득했고, 그렇게 나는 스무살을 맞이했다. 


'앞으로 뭘 하지? 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할 줄 아는 거라곤 수영밖에 없는데...'

다행히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덕분에 왕십리에 있는 성동청소년수련관의 수영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유아체능단 수영 교실과 실버반 어르신 수영 교실의 파트 타임 강사로 일했다.

처음에는 수영 훈련 레슨비를 벌기 위한 목적이었고,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막 처음 물 속에 들어와 "음파, 음파" 호흡법과 발차기를 배우며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어르신들의 미소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는 날이 늘어났다. 아이들과 어르신들은 웃는 법을 잊어버렸던 나를 다시 웃게 해줬다. 매일 새벽 같이 일어나 출근도장을 찍고, 6시간씩 물속에서 수업을 해도 그시간이 너무 고마웠다.

웃는 날이 많아질수록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잘 가르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래서 전문스포츠지도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하나를 따니, 또 다른 자격증이 눈에 들어왔다. 심판 자격증, 인명구조 자격증 등등 그렇게 계속해서 자격증을 따나가기 시작했다. 이 자격증들은 2년 뒤, 초등학교 운동부 전임코치, 소년체전 서울시 대표선수단 여자선수 전담코치를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D.P 아직도 하시나요?" 

아직도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D.P는 수영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을 위해 내가 만든 수영클럽팀의 이름이다. 벌써 10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다.

스무살 여름,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지도하는 재미와 즐거움에 푹 빠져있던 나에게 한 실업팀이 훈련비를 조금 지원해 줄테니, 전국체전에 출전할 의향이 있냐고 제안해왔다.

학생부가 아닌 일반부 시합을 나가보고 싶었던 나는 이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소속이 있어야만 전국체전에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

이후 나는 전국체전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실업팀과 좋은 조건으로 정식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맞이한 스물 한살, 나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과 계속 함께 있을 방법을 고민했다.

아이들을 지도하는 즐거움,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기쁨, 그리고 그들이 내게 주는 밝은 에너지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연 해적단, Dayoun’s Pirates", 줄여서 D.P라는 나만의 수영 클럽팀, 선수반을 만들었다. 당시 D.P에는 이름만 선수반이었지 처음 물에 들어와 ‘음파’ 호흡법부터 배우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좋은 제자들을 만난 덕분에 ‘음파’부터 시작한 D.P는 빠르게 각종 마스터즈 대회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료 코치님들은 D.P를 'Dayoun’s Power', 'Dayoun’s Promise' 등으로 부르며 기억해 주었다.      


난 제자들의 첫 시합을 보던 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손에는 땀이 한가득, 다리는 후들 후들... 그동안 내가 뛰었던 그 어떤 경기보다도 더 긴장됐다. 목이 터져라 응원했고, 결과에 상관없이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진심으로 격려해줬다. 

이 때의 경험은 제 인생의 새로운 모멘텀이었다. 이 날 이후, 나는 조금 달라졌다. '수영 선수로서, 한 사람의 인생 선배로서 더 잘해야 된다', '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다짐했다.      


전국체전을 비롯한 각종 시합에 출전할 때면 D.P 아이들이 보내줬던 응원 글들을 보곤한다.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선물이다. 그 때의 난 아이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싶었고, 그래서 더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했다. D.P 아이들은 나에게 20대 초반 좋은 성적을 내며 행복하게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되었다.


스무살의 가장 힘들었던 계약파기 이후, 그 시간이 없었다면 이후 코치, 감독, 교수의 삶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차분히 내공을 쌓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Take your marks"신호에 달려나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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