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고 일제히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누군가 마당에 닭이 들어왔다고 외친 탓이다. 그 짧은 외침에는 왠지 모를 설렘과 급박함 그리고 모든 사람을 마당으로 뛰어나가게 하는 능력까지 많은 것이 들어있었다. 마당에 돌아다니고 있는 하얗고 포동포동한 수탉을 보는 순간 왜 그 외침에서 설렘이 느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고기를 자주 먹지 못한 덕분에 닭이 백숙으로 보였다. 곧바로 닭을 잡기 위해 출동했는데 인생을 살며 걸었던 걸음 중 가장 비장했던 것 같다. 금방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날쌨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닭을 한참 잡다가 문득 최선을 다해 닭을 쫓는 다른 이들을 봤는데 나만 저 닭이 백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웃기면서도 짠했다. 어느새 닭을 좁은 통로로 몰아 구석에 포위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급박한 추격전에 손에 땀이 났다. 행여 막대를 놓치지는 않을까 다시 고쳐 잡기를 반복했다. 신호를 주고받은 뒤 서서히 그리고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포위망을 좁혀갔다. 바스락바스락 바닥에 풀과 모래 밟히는 작은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 세상이 잠잠히 절체절명의 순간을 주시하는 듯했다.
'맨손으로 덮쳐야 하나? 그러다 닭이 쪼면 어떻게 하지? 무서운데.'
그 순간 얼굴과 걸음에 옅게 드러난 두려움을 읽었는지 닭이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생명을 건 두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그 결정에 따른 행동에서는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나를 압도했다. 손을 뻗지 못하고 주춤대는 동안 닭은 포위망을 뚫고 달려갔고 꽤 높은 담벼락을 훌쩍 넘어 도망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넘어가지 괜히 희망 고문만 하고 가버린 닭이 야속했다. 상실감과 허무함이 아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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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혼자 해안 도로를 달렸다. 'B-612'는 가장 높은 곳의 고도가 해발 2~3m일 정도로 전체적으로 높낮이 없이 평평하고, 도로 바로 옆에는 에메랄드 바다가 펼쳐져 있어 달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이가 나 말고 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달리는 나와는 다른 이유로 달렸다. 들개 한 마리가 나를 사냥감으로 인식해 쫓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들고 올까 고민만하다가 두고 온 호신용 막대가 아쉬웠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아쉬워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특히나 개를 무서워하는 나이기에 전속력으로 달렸다. 50m, 30m, 20m… 아이스브레이킹 시간도 필요 없이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물리고 싶지 않아 잽싸게 근처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간발의 차이로 나를 물지 못한 개는 뭐가 그리 분한지 나를 올려다보며 맹렬히 짖어댔다. 다리를 최대한 끌어올려 몸을 웅크려 구조의 순간을 기다렸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청년 셋이 겁에 질린 나를 발견하고는 급히 막대를 들고 와 개를 쫓아내 줘서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역지사지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캄캄한 밤에 랜턴을 켜 빛을 비출 때 한 방향에서만 비추면 반드시 반대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때문에 밝게 보이는 면과 어둡게 보이는 면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에 빛을 서로 마주 보게 비춰야 그림자 없이 보고자 하는 대상의 온전한 형태를 볼 수 있다. 한 방향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대상을 온전히 보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개에게 쫓기고 나서야 쫓았던 닭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