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할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오늘 오후였다.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 서너 명이 술에 취해있는 할아버지에게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아이들이 떠나가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 매일 술을 마시며 잊으려고 했을까? 모르겠다. 그 어떤 사람도 여전히 어리며 여리고, 실수한다. 알코올에 중독되어 도둑질을 일삼는 행동이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수의 대가를 감당하기에 여리고 두려웠을 것 같다. 술에 취해있지 않고 맨정신이 들 때면 지난날의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니 이 세상에 혼자인 것 같고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알코올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건 할아버지 당신이 아니라 잘난척하는 사람들의 날카로운 말과 행동이지 않을까. 날카로운 말과 행동을 피해 더, 더, 더 구렁텅이로 밀려들어 간 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도덕적, 법적 잣대를 가지고 와 재보고 판단하며 손가락질할 때, 고개 숙이고 엎드려있는 사람에게 용기 내 용서를 베풀어준다면 그 용서는 어떤 처벌보다도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교훈을 주며, 그 사람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때로는 처벌보다도 용서가 필요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큰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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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뒤로한 채 나는 다시 야자수 숲 너머의 오션을 향해 걸었다. 숲이 깊어갈수록, 그러니까 오션에 가까워질수록 파도 소리가 커졌고 바다의 짠 내음이 바람을 타고 더욱 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오션과 맞닿아있는 마지막 야자수의 잎을 걷어내자 감히 그 끝을 가늠할 수도 없는 광활한 하늘과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 빛은 온 대지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고 바다는 무한한 원동력을 가지고 쉼 없이 밀려왔다. 촤아아. 반짝이는 바다 위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바닷바람 못지않게 시원했으며 바람을 타고 온 미세한 물방울들과 짠 내음은 내 오감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B-612'의 오션은 파도가 해변까지 올라와 하얗게 부서지는 보통의 바다와는 다르게 오션과 해변 사이에 바닷물이 얕게 찰랑이는 넓은 공간이 있으며, 그곳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존재한다. 파도는 경계선을 지키며 그 이상은 침범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경계선을 넘어 발을 들이면 집어삼키겠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파도 뒤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퍼런 바다가 파도의 경고에 신빙성을 더했다. 파도가 어찌 그리 크고 무서운지 이곳 사람들은 파도를 넘는 것을 성장의 상징으로 여기며, 얼마나 더 어린 나이에 파도를 넘어 태평양을 누볐는지를 자랑거리로 삼는다. 첨벙첨벙 물의 저항을 밀어내며 들어가 파도가 들이닥치는 지점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강한 바닷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와 내 머리 위로 작열하는 태양열마저도 불어 갔다.
자연은 때로는 잊고 있던 내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자연 앞에 서 있으니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고, 내 욕심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우주 속의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이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옳은 것보다 틀린 것이 많기에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
오래전 누군가 바보 같고 우스워 보이는 주장을 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
지구는 가만히 있고 태양이 도는 것처럼 보였기에 주장을 들은 모두가 비웃고, 무시하고, 얕잡아 봤을 것이다. 심지어 그 주장으로 인해 재판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하고 옳아 보이는 그 얕은 생각은 한 사람의 열정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짓밟았으며, 진실을 탄압하고, 본인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전 인류를 무지로 끌고 가는 것 이상의 일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 있는 만큼 단절되고 그 한계 안에서 살기 때문에 손해를 당한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LA는 도시가 형성되기 위한 필수 조건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막이었다. 생명체가 살기 힘든 그 척박한 땅에 400km 떨어진 콜로라도강에 송수관을 연결하여 물을 끌어왔고 그 물이 사막을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바꾸었다. 내 안에 내가 커질수록 내 목소리가 커지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작아져 내 안에 갇혀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혜를 끌어올 수 없어 손해를 당한다. 그렇기에 내 고집을 버리고 다른 의견을 듣고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