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있지만 'B-612'에는 없는 것이 많다. 강과 산, 고층 빌딩, TV 방송국, 택시, 기차, 놀이공원, 동물원, 대형병원, 축구장, 영화관... 그리고 담장과 대문. (대문이 없기에) 대문을 두드리는 대신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갔다. 인사 한 마디면 언제 어디서나 반갑게 맞이해준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는 'B-612' 문화의 일부다.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주는 메티의 딸들에게 도넛을 흔들며 미소 짓자 아이들이 평소보다 더 기쁘게(?) 반겨줬다.
메티가 종종 음식을 해주는데 너무 맛있고 고맙다. 특히 차우라면에 소시지 또는 닭고기를 넣고 끓인 음식이 가장 맛있다. 밥을 곱빼기로 먹는 내 모습을 보며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는 메티도 흠칫 놀라곤 한다. 오늘도 거실에 둘러앉아 메티가 직접 만든 파이를 먹었다. 겉바속촉의 식감에 연신 쌍따봉을 날리며 맛있다고 감탄하니 메티가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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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아저씨네 집 해먹에 누워 바다를 보는 것이 언젠가부터 내 일과가 되었다.
아저씨가 마당에서 생선튀김을 드시다가 해먹에 가는 나를 보시고 같이 먹자고 부르셨다. 권유에 못 이겨 한두 개만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었다. 특별한 소스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바삭한 튀김과 부드러운 살이 적당하게 짭짤했고 서로 잘 어울렸다. 아저씨와 나는 순식간에 쌓여있던 생선튀김을 다 먹어 치웠다. 아줌마는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보시다가 후식이라며 차를 가져다 주셨다.
TV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시간 잡아먹는 것이 전혀 없으니 'B-612'의 하루는 정말 단순하고 긴 것 같다. 바다를 보며 이야기하고 놀다가 배고프면 생선을 잡아먹으면 되고, 과일을 먹으면 된다.
마틴 아저씨와 나란히 해먹에 누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에메랄드 바다와 그 위를 평화로이 지나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작별을 앞둔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전통 노래인 ‘HAKA’를 불러주셨다.
잘 들어라. 네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
얼마나 오랫동안 그 문제를 지니고 있었더냐?
아들아 모든 것이 힘들어 보이고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이것만은 기억해라.
그 문제의 해답은 네 안에 있다.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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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친구들이 송별 파티를 해줬다. 오늘도 음식을 잔뜩 준비해줬고, 선물을 한 보따리 줬다. 오늘 알게 되었는데 그동안 나를 위해 해줬던 네 번의 파티와 선물 보따리는 모두 외상하고, 빌리고, 버스비를 아껴가며 준비했다고 한다. 정말 고마웠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큰 사랑을 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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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사계절이 있어서 기온과 자연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지만 'B-612'는 1년 내내 날씨가 똑같아서 시간 가는 것을 잘 모르겠다. 전혀 실감 나지 않지만 어쨌든 벌써 오늘이 'B-612'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의 'B-612'는 내게 마지막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B-612'였지만, 사실 'B-612'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도 에메랄드빛의 라군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오션은 광활한 자연의 극히 일부를 보여주며 자연 앞에 고개 숙이게 했다. 오늘도 태양은 온 대지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고, 나무는 똑같은 자리에 서서 그늘과 열매를 내어줬으며, 구름은 아무 불평 없이 자연이 이끄는 곳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오늘도 사람들은 바다에서 낚시했고, 우물에서 물을 길었고,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잤고, 나에게 미소 지으며 인사해줬다. 오늘이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아니라 매일이 소중했던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자주 소중함을 잊는다.
이 세상은 시간 아래 속해있기 때문에 절대 영원함이 있을 수 없다. 열역학 제2 법칙은 엔트로피에 관한다. 물리학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엔트로피’로 구분한다. 과거에는 낮았던 엔트로피가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진다. 무엇이든 변해가고, 무엇이든 늙어가고, 무엇이든 닳고 깨져간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다. 언젠가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과 이별해야 할 순간이 온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중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일 'B-612'를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이제 진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입을 겨울옷과 신발, 카메라와 외장하드, 휴대폰과 받은 선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친구들에게 줬다. 특히 페로에게는 옷을 많이 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빨리 한국에 가고 싶었는데 막상 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니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