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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담 Dec 02. 2023

김 부장의 어떤 하루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출근길이었다.

단지 12월의 첫날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어제 퇴근길에   달력이 바뀌는 날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회사를 떠나온 지 한참 후였다.

급하게  당직을 서는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회장님 방의 액자형 달력을 12월로 넘겨 달라고 부탁했다.

달력을 넘기는 일이 언제부터 나의 업무로 정착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매월 말일이 되면 잊지 않고 달력을 새 달에 맞춰 넘겨 두어야 한다.

아마도 관리부 소관이라 그렇게 자리 잡은 듯하다.

혹시라도 달이 바뀐 줄도 모르고 있다가는 회장실에 불려 가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출근하는 회장님 차가 주차장에 보였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노인네  일찍도 왔네'

마음속에서 새벽같이 출근한 회장님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반발심이 생겼다.

올해 일흔둘의 노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출근을 하는 걸 보면서 존경심보다는 이제 은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화장실 청소와 마당 쓸기, 점심 식수 인원을 파악하여 식사 주문까지 마치고 나서 생산일보를 정리했다.

"아, 드디어 이번 주 일요일 마지막 묘사(墓祀)다."

회장 조카인 영업 부장의 안도의 넋두리를 들으며 그가 올해 가을에 회장을 모시고 가야 하는  문중의 묘사가 여섯 번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오늘 회장님 모시고 묘사장 보러 갑니다. 내 점심은 빼 주세요"

영업 부장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11시쯤 상황이 급변했다.

거래처에서 회사를 방문하는 바람에 영업부장이 미팅에 참석해야 해서 묘사장 보러 가기 힘들 거라고 내가 가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지러웠다.

'내가 왜 남의 집 사 장을 보러 가야 하냐고?'

나는 소리 없이 외쳐 보았지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였다.

노동법에는 회사에서  업무 외의 사적인 일은 못  시키게 금지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건 다른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노동청에 민원을 넣는다는 건 내가 이 회사를 떠나겠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그러니 닥치고 따라나서는 것  밖에 나의 선택지는 없다.

점심을 먹고 드립 커피를 한잔 내리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회장의 호출이었다.

장 보러 나가야 하니 영업용 차에 시동을 걸고 대기하라는 지시였다.

회장을 태우고 북구에 있는 도매시장을 향해 출발했다.

도시고속도로 입구 톨게이트에서 통행권을 뽑고 차량의 물결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톨게이트 출구가 보이자 영업용 차에 하이패스가 없다는 생각이 났다.

주머니를 뒤적여 천 원권 두장을 꺼내 통행권을 지불하고 또 달렸다.

북구에 있는 도매시장은 거의 이용한 적이 없어서 한두 번 정도 왔던 기억이 났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팔달교를 지나 고가도로 아래에서 좌회전하는 코스로 운행을 했다.

고가도로 아래로 들어서는 순간 뒷좌석이 소란스러웠다.

"매천교로 안 가고 왜 이리 왔어?"

회장은 화난 목소리로 자기가 의도한 코스로 오지 않은 나를 나무랐다.

"제가 여기는 이길 밖에 몰라서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도 대꾸했다.


청과시장 안에 진입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돌아다녔다. 도매시장에서 소매가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회장은 그럭저럭 한 군데 중도매인 가게에서 소매로 사과와 배를 몇 개씩 구매했다.

그리고 돌아서 나오며 '바가지를 썼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은 건어물 파는 곳이었다.

황태포, 대구포 등의 제수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야 하는 데 도통 길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회장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건어물  파는 데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데?"

회장은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인 말에 나는 멘붕이 왔다.

"니는 장 보러 오면서 시장에 대한 사전 정보도 조사 안 했더냐?"

나는 입을 닫고 묵언 수행에 들어갔다.

운전하는 내내 차가 세차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느니

운전을 거칠게 한다느니, 나태하다느니 하면서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나는 도롯가에 차를 세우고 차키를 뽑아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도 나는 나를 다독이며 잘 참아냈다.

그리고 수산물 센터에 들러 문어도 사고, 하나로마트에 들러 황태포와 오징어까지 사서 회장님 댁의 현관 입구까지 제수용품을 들어다 드리고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로 돌아올 무렵 거리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그렇게 나의 전쟁 같은 하루는 또 지나갔다.

오늘은 회장이 차를 회사에 두는 바람에 내일 아침에 그를 모시러 가야 한다.

나는 내일 새벽잠이 덜 깬 부릅뜬 눈으로 회장님 댁으로 달려가 회장님을 모시고 회사를 향해 또  달릴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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