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할아버지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게 언제부터였는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소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는 할아버지 집안일을 돌보며 그곳에 살았으리라. 소년은 그가 할아버지 댁의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척척해내는 집사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그를 '오(吳)상'이라고 불렀다. 소년은 아직 어린 탓에 그의 이름이 오상이라고 생각했었다. 한참 자란 후에야 오 씨 성을 가진 아저씨이고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오상이라 불렸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 씨 아저씨는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다.
대문 옆의 문간방 한 칸을 얻어서 살아가는 힘겨운 삶에도 그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일곱 살 먹은 소년이 그에게 '오상, 오상' 하며 놀려도 그냥 허허 웃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바보 같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변소 청소를 하느라 똥지게를 지고 가던 아저씨. 잔칫날 동네 사내들과 돼지를 잡느라 젖 먹던 힘까지 쏟던 오 씨 아저씨의 기억은 아직도 소년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도 멀쩡한 마누라가 있었고 소년 또래의 딸이 하나 있었다. 여자아이 이름은 순남이라고 했다. 맏이가 딸이라 둘째는 아들 낳으라고 이름을 순남이라고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년은 소녀가 오 씨 성의 아버지를 두었으니 오순남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렸다.
순남이는 단발머리에 두툼한 입술, 통통한 볼을 지닌 여자애였다. 소녀라기보다는 여장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부지런한 아이였다. 그녀는 소년에게 미꾸라지 잡는 법, 개구리 잡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새끼 꼬는 방법도 전수해 주었다.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밥도 하고 빨래도 하는 그야말로 소녀가장 같은 억척 소녀였다.
소년은 여덟 살이 되자 도시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오 씨 아저씨와 순남이가 있던 고향을 떠났다. 순남이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떠나왔지만 도시로 가서도 소년은 자꾸 순남이 생각이 났다.
순남이의 나풀거리는 단발머리와 짙은 눈썹, 그리고 두툼한 입술까지 그녀의 모든 게 그리웠다.
소년은 4학년이 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부모님은 생업이 바빠 고향을 찾을 겨를이 없었고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소년도 더 이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 사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소년은 여전히 혼자서 고향에 다녀 올만큼 자라지 못했다.
그래도 소년은 한 번씩 순남이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마침내 소년은 4학년이 되었다. 소년은 큰 결심을 했다.
혼자서 시골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4학년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시골에 가겠다고 몇 날 며칠을 떼를 써서 드디어 혼자의 힘으로 시골로 떠났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음도, 뽀얀 먼지를 날리는 시외버스도 고향으로 향하는 소년에게는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멀리 시골의 국도변에 미루나무가 끝없이 펼쳐질 때쯤 고향이 눈앞에 나타났다. 소년은 너무 신이 나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한 달음에 고향집 대문 앞까지 달렸다.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혹시라도 순남이를 만나면 깜짝 놀라게 할 요량으로 살며시 문간방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 년 전 고향을 떠나오던 날 말없이 훔쳐보았던 순남이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은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남이네 집을 바라본 순간, 소년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심장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맘 좋은 오 씨 아저씨도, 들꽃같이 순수하던 소녀도 없었다.
그저 쓰러져가는 폐가 한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오상이 아마 삼 년 전쯤 죽었지. 순남이 엄마가 순남이 동생 낳다가 죽고 나서 매일 술만 마시고 시름시름 앓다가 그리 갔구먼. 그질로 순남이도 보따리 싸서 떠났다.
대구에서 순남이 봤다는 마을 사람이 있던 데 공장 다니는 것 같다 하더라. 참 불쌍한 지집아지."
소년은 큰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향을 떠나기 전 "오상, 오상"하며 그를 놀렸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아저씨가 살아 계셨으면 오 씨 아저씨라고 다시 불러 드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하늘 아래 살고 있을 순남이가 언젠가 고향을 찾을 거라는 생각에 소년은 매년 방학 때면 고향을 찾았지만 순남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소년은 흰머리 성성한 초로의 노인이 되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고향집을 찾았다. 순남이네 집 앞에 이름 모를 들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는 들꽃 같은 소녀를 떠올리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