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8월 12일 새벽 전화벨 소리는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공간을 나누기 위한 형식적인 벽 넘어 숨소리까지 들리던 아버지의 통화음. 전화국을 다녀서 남들보다 집전화를 빨리 들였던 아버지는 본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전기통신을 통해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들어야 했다. 그 상황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훈장처럼 여기던 전화국을 때려치셨다. 그렇게 당신의 삶은 멈췄고 막걸리로 삼시 세 끼를 사셨다. 그 여름 나는 흰색 러닝셔츠 바람으로 손등 쪽 검지와 중지 사이에 막걸리 주둥이를 끼우고 얼마나 달렸는지 새어 흘러나와 손가락을 적셨던 막걸리 냄새가 아직도 배어 있는 듯하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취해있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노온에서 울고~' 아버지는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장례물품을 정리하느라 왔다 갔다 하는 이모 삼촌 고모들을 도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찾아온 적막. 아니 '쎄~~ 쉬~~ 쎄~~ 쉬~~' 리듬과 음정을 분간할 수 없는 소음.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헛기침을 하고 발을 세게 구르며 신발을 벗었다. 그래도 가시지 않는 요란한 적막. 어머니의 죽음을 전했던 빨간색 몸체에 동그란 검정 다이얼이 달린 납작한 형태의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모를 찾았다. 전기통신을 통해 전해오는 이모의 음성에 나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막걸리 냄새 밴 12살 소년의 손에는 점점 여러 종류의 음식 냄새가 섞였고 아버지의 술상을 차렸으며 연탄을 사다 날랐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엑스축(x) 정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에 올라타 몸집은 점점 커졌고 손은 빨라졌다.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을 만져야 나에게 새 음식이 생겨난다는 사회의 룰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나의 손은 연필과 책을 갈망했다. 찬 돌과 거친 흙을 등에 짊어져야 이불이 깔린 바닥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내 손은 부드러운 여성의 살결을 갈망했다. 대학도 들어갔고 결혼도 했다. 홀로 살아가는 가난뱅이 소년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나의 삶은 '현실-현실-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눈이 부셔 눈을 떠 보니 태양이 비추고 있는... 써니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태양이 떠 있는 것은 현실이지만 태양의 존재는 비현실이듯 써니의 존재는 나에게 비현실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가끔 일어나는 특별한 날이었기에 결혼 후 10년이 지나 아이를 포기한 후 찾아온 써니는 초자연적 기운에 의한 것이라 할 수밖에. 이후 나의 삶은 '현실-비현실-현실-비현실-현실-비현실'이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현실 속 비현실을 오가며 어딘가에 있을 행복을 찾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대변인이라는 직업세계에서 기자들과의 줄다리기는 극사실주의적 현실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써니를 마주하는 비현실의 시간들. 이러한 극단적 반복 속에서 나의 자세는 점점 어정쩡해졌다. 일요일 집에서도 여행 중 써니를 안고서도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기자들과의 전화통화를 이어갔다. 행복을 찾아 비현실 속으로 들어갔지만 전기통신을 통한 현실과의 소통에 오히려 집착했다. 아물지 않고 방치된 나의 유년시절 상처는 '먹고사는 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며 아빠의 육체적 정신적 부재를 정당화했다. 아내 역시 "써니, 아빠 전화 통화하시잖아~"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비정상은 이어졌다. 거기에 점점 심해지는 알콜 의존까지.
그사이 시간은 야속하게도 엑스(x)축 정방향으로 쉼 없이 흘러간다. 그렇게 나는 시간에 올라타 몸집은 점점 외소해지고 손의무뎌짐을 느낀다.
2019년 써니가 5살 되던 해 무작정 시작한 캠핑.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자동차 지붕 위 매달린 박스에 20여 킬로그램이 넘는 물건을 번쩍 들어 넣을 수 있는 체력이 있고, 캠핑 중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와 강풍을 방어할 만큼 빠른 손이 내게 남아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니 감사함이 맞겠지.
돌 틈이며 의자 등받이 주머니, 나뭇잎 아래 숨겨진 작은 종이 조각은 보물찾기 놀이와 함께 각종 금은보화가 된다. 하얀 도화지에 그려진 수채화는 들판에 세워진 너른 마당 우리 집을 갤러리로 만드는 마법도 부린다. 각종 크고 작은 캠핑 용품 보따리들은 펼치기만 하면 새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부엌이 되고 보드라운 이불이 펼쳐진 방이 되는 요술램프와 같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가 그려 놓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힘찬 구령과 함께 시작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타임머신이 돼 시간을 달리기도.
듬성듬성 빈 나의 정수리를 아직은 볼 수 없는 7살 써니. 언젠가는 나의 정수리를 보겠지.
듬성 등성 빈 나의 정수리를 아직은 볼 수 없는 7살 써니. 써니는 커갈 것이고 나는 작아질 것이다. 내 정수리는 언젠가 써니에게 발각되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 나에게는 요술램프가 있다. 마법처럼 펼쳐진 들판의 너른 마당우리 집에서 써니와 호흡을 맞출 기회들도 남아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친 바닥을 고르고 마른 잠자리를 만들며 써니와 나는 들숨과 날숨의 진폭을 맞춰가고있다.
'마흔한 살 차이'에서 '마흔 살'을 떼어낸 대화는 타오르는 모닥불 불멍과 함께 밤하늘 우주 공간과 버무려져 추억이라는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 낸다. 그 추억의 장면은 각자가 느끼는 시간 흐름의 방향과 속도와는 무관하게 그 자리에 영원히 존재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기쁨의 절대적 좌표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 써니와 써니의 써니가 함께 바라보겠지.
나는 오늘도 서울 근교 어딘가의 너른 마당 우리 집에서 시간을 달려서 마흔한 살 차이 써니와 마흔을 떼어내고 비행기 팔을 한 채 달리고 있다.
지금 턱 밑까지 차오르는 들숨 날숨이 12살 써니가 막걸리 냄새밴 12살 소년을 만나기 전 내 가슴속 상처를 아물게 해 줄 처방전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