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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 작 Apr 02. 2021

영혼에 충격을 주기 위한 닭고기 스프 <오골계백숙>


'백숙'이란 걸 좋아하지 않아. 너도 복날엔 반드시 보양을 해야 한다며 삼계탕 대신 치킨을 뜯아?

'백숙을 좋아한다'는 말은 '나이 든 한국사람'이란 말과 동의어일꺼야.  그건 영화 <집으로>에서 물에 빠진 닭에 오열하던 유승호가 증명해줬지.


그러니 앞서 '오골계숯불구이'에 받은 감동으로 넉다운이 되었던 나는 벽에 붙은 '오골계백숙'메뉴를  '물은 셀프'와 같은 비중의 문로 취급하고 있었지.  

하지만 나의 일행 중엔 '나이 든 한국사람'이 있었고, 난 유승호처럼 오열할 준비를 했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사장님이 냄비를 들고 나왔을 때, 난 공포에 사로잡혔어.

북유럽에서 문어를 '악마의 물고기'로 취급했다지만, 이 뽀얀 국물속에 몸을 숨긴 검은 닭을 봤다면 '악마의 음식'으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꺼야.  

사람의 편견은 정말 힘이 커. 원래 하얘야만 하는 그 무엇이 검게 나올 때는 어색함을 넘어 뭔가 공포가 찾아온다니까.

누군가는 그걸 "나와 아내 둘다 백인인데, 임신한 아내가 앙증맞고 까만 흑인 아이를 낳았을 때처럼"이라고 비유하더군.

 

그래도 난 백숙을 제법 먹어봤다고, 자연스럽게 닭기름을 걷어내려 국자를 들었지.

근데...어라? 어디갔지? 으레 떠 있어야 할 기름이 없는거야. "사장님, 기름을 미리 걷어내셨어요?" 내 질문에 사장님이 그런 귀찮은 일을 왜 하냐는 듯 "아뇨. 우린 기름 걷어내고 그런거 없어요. 끓인 그대로 나온거예요."

믿을 수 없다! 난 거짓말 탐지기처럼 사장님의 표정을 스캔했어.

'사장님은 분명 슬램덩크의 강백호병에 걸렸을 거다... 타고난  천재소리를 들으려고, 밤새 죽어라 연습해놓고 하나도 연습안한 척 하는! 타고나게 맛있는 닭이란 거짓말을 위해, 손님몰래 미친듯이 기름을 걷어내고는 저렇게 태연한 척 연기하는 걸거다.. 아니 그렇다면! 냄비벽면에조차 한방울의 기름흔적이 남지않게 한 사장님은 <기름 걷어내기 달인>이 틀림없다!'

그게 나의 결론이었어.


그리고 그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을 때... 다시 한번 사장님에게 물었지.

"사장님... 크림 넣었죠?"

"?...뭘 넣어요?

"크림소스 파스타에 들어가는 그 크림요."

"아, 아뇨."

"근데 이거 왜 닭백숙에서 까르보나라 맛이 나요?

"까...뭘 까라구요?"


내 말이 음식에 대한 감탄인지, 아니면 컴플레인을 걸고 공짜백숙을 얻어먹으려는 진상인지를 판단하지 못한 사장님은 잠시 머릿속에 로딩이 걸린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지.

하지만 질문을 한 나도 혀에 로딩이 걸리긴 마찬가지였어

도대체... 이 고급진 북유럽 7성급 호텔 스프같은 풍미는 무엇이란 말가?!


"정답! 육수를 따로 뽑아 쓰시는구나!"

"그냥 맹물 쓰는데?

"에?...그럼 대체 왜 이런 맛이..."

"아...엄나무를 넣어서 그럴꺼예요."


사장님이 냄비안에 든 엄나무 조각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니야... 누가 엄나무 넣은 닭백숙을 안 먹어봤을 줄 알고?엄나무 회초리로 종아리까지 맞아본 사람으로서 단언하건데, 엄나무는 거들뿐!

궁금함을 못참고 검은 오골계 괴물고기와 유일하게 든 다른 건더기인 감자, 그리고 그 괴물의 진액을 계속 들이켰어.

그리고 어느순간!  난 사장님도 모르는 3가지의 정답을 발견한 것 같았어. 그건  사장님조차도 너무 익숙해서 모르고 있었던 거야.


첫째는 바로 사장님이 늘 먹어서 그 가치를 잘 모르는 강원도 감자. 그 감자에서 나오는 은은하고 크리미한 특유의 향이  마치 유럽 시골할머니가 감기 걸리면 해줄듯한 '생크림 감자스프'맛을 떠올리게 한 거야.  


둘째는  '잘 손질한 줄 모르고 잘 손질한'  활닭손질 스킬! 기름과 잡스런 부위를 무심한 듯 디테일하게 제거한 칼질! 살을 저미는 미묘한 칼의 각도가 180도 다른 맛을 구현해 낸 거지.  

 

세번째 답은  흐물흐물하고 질겅질겅해서 평소라면 절대 먹지 않는  백숙의 닭껍질을 먹어 보고는 깨달았어. 이것만은 차이가 없으리라 확신했건만... 오호라! 이 식감은...눈을 감고 먹으면 짬뽕에 들어간 목이버섯과 절대 구분할 수 없을거야!

이게 무슨 뜻이냐!? 오골계라지만 사장님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닭의  품종! '오계'니 '오골계'니 '백봉오골계'니 많은 말들이 있지만, 그게 어느 시대에 어느 닭과 바람이 나서 어떤 유전자로 전해져 내려왔는지 완벽하게 알 수 없거든. 그러니 사장님의 가게에 공수되는 오골계가 너무나 운 좋게도 목이버섯 껍질을 덮어쓰고 살도록 진화한 닭인거야!


서양에서 소고기스테이크를 먹는 문화에 왜 소스가 많이 발달한 줄 알아? 걔들은 지방없는 살코기부위만을 선호하잖아. 먹다보니 퍽퍽하고, 퍽퍽하니 그걸 소스로 보충하는거지.

양념을 잔뜩 버무린 고기도 맛있지만, 그럼 적어도 그 고기자체의 수준을 자랑하지 말아야 돼.

고가의 최고급 생선은 결코 회무침으로 쓰지 않듯이. 쓰리뿔 소고기부위 결불고기양념이 1순위가 아니듯이.

닭백숙에 한약재를 잔뜩 집어넣은 걸 자랑한다면, 닭 자체에 자신이 없다는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생각이 이곳의 닭백숙을 먹어본 후에는 '개인적인 의견'에서 '객관적 사실'이 되고 말았어.


너도 <영혼에 충격을 주기 위한 닭고기 스프>를 먹고싶다면, 강원도 양구에서 나를 불러.  말 어마어마하게 맛있는 오골계 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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