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북스 Sep 03. 2024

티 없이 맑은3

"네? 밝은 이미지라는 얘기를 많이 듣기는 해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감사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칭찬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인색하지만, 이루리 씨는 역시 달랐다.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는 일도 누군가로부터 낯간지러운 칭찬을 수용하는 일도 잘 해내었다.

손사래 치며 겸손을 넘어서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으로 보였다. 어떤 말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그녀였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함께 걸었다.

회사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산책하기 좋은 돌담길이 이어져있다. 여름에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돌담을 따라 늘어져 있다. 능소화는 화려하지 않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발하는 우직한 아름다움을 가졌다. 한 여름의 강한 햇빛을 견디며 피어나는 꽃. 따뜻하고 포근한 날씨가 아니라 구태여 덥고 숨 막히는 이 여름에 피어나 여름이 끝남과 동시에 떨어지는 꽃.

 오늘따라 그 꽃이 외롭게 느껴졌다. 연한 다홍색 꽃잎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듯한 모양새가 아련하게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옆에서 담벼락에 감겨 자란 덩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루리 씨에게 어떤 꽃이 어울릴지 내가 아는 범위 내 몇 안 되는 꽃들을 떠올렸다.

장미? 아니, 그녀는 세련된 건 맞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마냥 도도한 사람은 아니다.

해바라기? 그녀는 분명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묘하게 흐르는 매력이 있다. 해바라기처럼 마냥 밝기만 해서 속내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외모가 전형적인 미인이 아님에도 눈이 가듯이 은근한 끌림이 있어야 한다.

은방울꽃. 그래. 이거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오밀조밀한 게 자꾸만 보고 싶은 그녀와 닮았다. 지켜주고만 싶은 꽃.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녀. 그 둘은 닮아있다.

"날씨가 많이 더워졌어요. 빨리 가을이 와서 선선해지면 좋겠어요. 그러면 산책도 자주 할 수 있고 좋을 텐데. 주임님, 이제 들어가죠. 더워서 땀이 너무 나네요."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서 말하는 이루리 씨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붉게 익어 있었다.


 회사에 들어와 자리 앉아 점심시간의 일들을 되뇌었다. 이루리 씨랑 단둘이어서 밥을 먹고 산책을 한 것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그녀가 무슨 꽃을 닮았는지 깊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만약 사람이 색깔 렌즈 안경을 끼고 살아간다면 나의 안경알은 회색일 것이다. 생기를 느낄 일이 거의 없는 삶이다. 작은 것에도 호들갑 떨며 울고 웃는 사람들이 이해가지 않는다. 언제 어떤 고통이 다가올지 모르는 불안이 도사리는 삶에서 작은 감정은 사치이다. 쉽게 슬퍼해서도, 안심해서도 안된다. 더 큰 슬픔이 밀려올 때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안심한 순간 마주하는 고통은 원래보다 몇 배나 더 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감각이 무뎌진 채 유지하는 자세가 살기 위해 몸에 배어버렸다. 

 이루리 씨의 안경은 무슨 색 렌즈일까? 한 번쯤은 그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마냥 행복한 세상일지. 행복은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이전 03화 티 없이 맑은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