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만 하는 핑계

by 안태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키아프 아트페어와 프리즈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그림은 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 아실 것 같아 알려드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다양한 미술 작품들이 지천에 널려있었습니다. 마치 동묘 난전에서 발렌시아가, 파텍 필립, 루이 비통, 고야드 등이 팔리고 있는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작품의 가격을 문의하고, 작품의 가치에 대해 논하는 말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아트페어는 처음이었지만, 그간의 전시회와는 다소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들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장파 작가의 ‘레이디 X 시리즈’(Lady X series) 중 하나였습니다. 예전에 정말 흠모하며 읽던 김언희 시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작품을 찍은 휴대폰 사진을 계속 응시하다가, 흘러내리는 삶과 죽음 속 여체는 어떻게 주체성을 가지는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가 남성이라는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작가가 표현하려던 감정과 주제를 오롯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큰 아쉬움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 김언희를 흠모하다 그녀의 색채만 따라가고 그녀가 전하려던 메시지를 거세해버린 시들을 따라 쓴 적이 많았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애초부터 잘못된 방식의 모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시는 일찍 포기했습니다. 나중에 나의 것을 찾으려고 해본 적도 있었지만 도저히 찾아지지 않아 포기한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키아프에 출품된 작품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은 이들의 성취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과거 ‘포기’의 핑계들을 만들어내면서 놓아버렸던 일들이 많습니다. 영화를 포기한 것도 결국에는 돈 문제였지만 ‘재능이 없는 건 빨리 놓아버리는 게 낫다’라고 핑계를 댔으며, 몇몇 시나리오를 쓰다가 포기한 이유도 사실 엉덩이 힘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애초에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핑계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렇게 포기한 것들은 결국 미련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하지 말아야 하는 핑계들을 지우고 해야만 하는 이유들을 만들면서 생활하려고 합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버티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면서부터라는 이유는 명확하게 기억합니다.


언젠가 정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는 해야만 하는 이유들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해야만 하는 이유들이 사라진다면 그때는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핑계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한 문장을 쓰려고 머리를 벅벅 긁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한 문장이 좋은 삶으로의 한 걸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장파의 ‘레이디 X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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